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路上所見(노상소견) - 강세황(姜世晃)

Bawoo 2017. 11. 28. 22:06

路上所見(노상소견) - 강세황(姜世晃)

 

凌波羅襪去翩翩(능파라말거편편) : 비단버선 신고 사뿐 사뿐 걸어가더니

一入重門便杳然(일입중문편묘연) : 중문 안으로 들어가 사라져 버렸네.

惟有多情殘雪在(유유다정잔설재) : 다정할 사 그래도 잔설이 있어

痕留印短墻邊(호흔유인단장변) : 담장 옆으로 난 그녀 발자국이 고와라


凌波羅襪(능파라말) ; 凌波微步 羅襪生塵에서 따온 말,

 얼음(凌) 위를 종종걸음으로 걷듯 미인의 걸음 걸이가 가볍고 아름다운 모습.

 羅襪:비단버선/ 翩(편) ; 훌쩍 날다, 오락가락하다 / 屐(극) ; 나막신






강세황 (姜世晃 ; 1712~1791)  


본관은 진주(晋州)이며 자는 광지(光之)이고 호는 첨재(添齋)·표옹(豹翁)·노죽(路竹)·산향재(山響齋)·표암(豹菴). 해산정(海山亭)·무한경루(無限景樓)·홍엽상서(紅葉尙書)이다. 시호는 헌정(憲靖)이며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8세 때 시를 짓고, 13~14세 때는 글씨에 뛰어난 솜씨를 보여, 소년기에 쓴 글씨조차도 병풍을 만드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아버지의 사랑과 교육을 받았으며, 매형이었던 임정(任珽)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 처남 유경종 외에도 허필(許樣) ·이수봉(李壽鳳) 등과 절친하게 지냈으며, 이익·강희언 등과도 교유하였다. 당대의 유명한 화가였던 김홍도·신위 등도 그의 제자들이다. 벼슬에 뜻이 없어 젊은 시절에는 주로 작품활동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현(?)의 3남6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생모는 광주이씨로 집안은 대대로 학문과 장수를 누렸으며, 할아버지 백년(柏年), 아버지 현에 이어 71세 때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감으로써 이른바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로 칭송받았다. 후손으로는 부인 진주유씨(晉州柳氏)소생인 인·완·관·빈과 나주나씨(羅州羅氏)소생의 신(信)이 있는데, 신과 그의 아들 이오, 완의 손자 진이 그림으로 이름이 있었다.


  32세 때 가난 때문에 안산(安山)으로 이주한 뒤에도 오랫동안 학문과 서화에만 전념하였다. 처음 벼슬을 한 것은 61세로, 영조의 배려에 힘입어 관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64세 때 기구과(耆耉科), 66세 때 문신정시에 장원급제하였으며, 영릉참봉·사포별제(司圃別提)·병조참의·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72세 때 북경사행(北京使行), 76세 때 금강산 유람을 하고, 기행문과 실경사생 등을 남겼다. 시·서·화의 삼절로 불렀으며, 식견과 안목이 뛰어난 사대부 화가였다. 그 자신은 그림제작과 화평(畵評)활동을 주로 하였는데, 이를 통해 당시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을 정착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이밖에도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발전시켰고, 풍속화·인물화를 유행시켰으며, 새로운 서양화법을 수용하는 데도 기여하였다. 평생 동안 추구한 그의 서화의 세계는 궁극적으로 습기(習氣)도 속기(俗氣)도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었다. 산수·화훼가 그림의 주소재였으며, 만년에는 묵죽으로 이름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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