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鶴洞
-曺植
獨鶴穿雲歸上界(독학천운귀상계)홀로인 학 구름 뚫고 천상으로 돌아가고
一溪流玉走人間(일계류옥주인간)옥같은 물 흐르는 개울 인간계로 가는구나
從知無累翻爲累(종지무루번위루)근심 없음이 근심 되는 것임을 아니
心地山河語不看(심지산하어불간)마음속 산하는 보지 못했다 말해야겠구나
累:근심. 번거로움
翻:뒤집다.
심지 [心地]마음의 본바탕
1558년(명종 13)경 남명 조식이 경상남도 하동군의 청학동 일대를 유람하고 지은 한시.
[개설]
「청학동(靑鶴洞)」은 조식(曺植)[1501~1572]의 『남명집(南冥集)』 권1에 수록되어 있다. 조식이 지리산[1,915m] 청학동을 유람한 것은 58세 때인 1558년(명종 13) 4월 10일부터 4월 26일까지이다. 조식의 거주지인 합천 삼가(三嘉)를 출발하여 진주를 거쳐 사천에서 배를 타고 섬진강을 따라 내려가서는, 조선 시대 선비들의 청학동 유람의 대표적 유적지인 하동 삽암(鈒巖), 악양정(岳陽亭), 쌍계사(雙磎寺), 불일암(佛日庵), 신응사 등을 유람하였다. 함께 동행한 이는 진주목사 김홍(金泓), 조식의 벗인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 구암(龜巖) 이정(李楨)[1512~1571] 등이었다.
「청학동」은 조식이 청학동이라 인식한 불일암 일대를 유람하고서 읊은 작품으로, 58살에 유람할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되나 확실하지는 않다. 조식은 자신의 유람록인 「유두류록(遊頭流錄)」에서 지리산을 13번이나 답파하였다고 피력하였다.
조식의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산해(山海)·방장산인(方丈山人) 등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훈구파와 사림파가 대립하여 여러 차례 사화(士禍)가 발생한 16세기 전반기를 살면서 출처(出處)의 대절(大節)을 보인 인물이다. 또한 성리학이 한창 꽃피던 시절에 형이상학적 명제의 탐구로 흐르는 학풍을 걱정하여 철저하게 실천적인 학풍을 내세웠다.
조식의 학문은 성리설을 이론적으로 전개하는 것을 지양하고, 심성 수양의 수양론 위주로 학문의 방향을 잡았다. 성리학 가운데 특히 수양론에 치중하였기 때문에 만년에 자신의 학문을 경(經)·의(義)로 특징 지웠다. ‘경’은 마음이 움직이기 전의 내적 함양을 뜻하며, ‘의’는 마음이 움직이고 난 뒤 외적 성찰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성찰 과정에서 마음에 사욕이 생기면 곧바로 물리치는 극기(克己)를 내세웠다. 조식의 학문은 ‘존양(存養)-성찰(省察)-극기(克己)’의 3단계 수양론으로 요약되는데, 그 요지가 「신명사도(神明舍圖)」와 「학기도(學記圖)」 등에 잘 나타나 있다.
[구성]
칠언 절구의 구성법에 맞게 지은 한시이다. 청학동에는 예부터 신선이 타고 다니는 푸른 학이 살고 있다고 전한다. 제1구와 제2구는 청학동을 찾아보니 청학은 이미 하늘로 날아가 버리고 폭포만이 인간 세상으로 흐르고 있음을 표현하였다. 이때의 폭포는 불일폭포를 가리킨다. 제3구와 제4구에서는 속세를 벗어나려 애쓰는 그 자체가 벌써 얽매임이 되니, 모든 산수 자연을 인위적인 작용이 배제된 순수한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고 노래하고 있다.
[내용]
독학천운귀상계(獨鶴穿雲歸上界)[외로운 학은 구름 뚫고 하늘로 올라갔고]
일계류옥주인간(一溪流玉走人間)[구슬 같은 한 시내 인간 세상으로 흐르네]
종지무루번위루(從知無累翻爲累)[누(累) 없음이 도리어 누가 됨을 알고서]
심지산하어불간(心地山河語不看)[마음속 산하는 보지 않았다 말해야겠네]
[특징]
제2구와 제4구에 각각 ‘간(間)’, ‘간(看)’의 운자를 썼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 선비들의 청학동 유람은 현실에서의 좌절과 불화를 위로받기 위한 이상향으로서의 관념적 공간이었으며, 대체로 하동 쌍계사에서 불일암과 불일폭포 일대를 유람하는 것으로 일관되게 나타난다.
조식의 지리산 유람록인 「유두류록」은 조식이 죽은 후 서부 경상남도의 유학자들에게 지역의 명산인 ‘지리산 인식’의 전범이 되었던 작품이다. 특히 19~20세기 한말의 유학자들에게 있어 조식의 지리산 유람은 자신들의 학문적 근원을 찾는 구도(求道)의 장이었는데, 「청학동」은 그러한 과정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한 키워드로 작용하였다.
조식은 성리학의 이론적 성향이 만연하던 16세기에 실천적 수양론을 강조하였던 대표적인 학자로, 이러한 성향은 청학동의 산수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그대로 표출되고 있다. 「청학동」은 현실의 문제를 산수 자연에 의탁해서 해소할 것이 아니라 자연 경관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 곧 자연에 대한 인식과 함께 마음의 수양을 강조한 것이라 하겠다.
[참고문헌]
최석기 외,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돌베개, 2000)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번역 남명집』(한길사, 2001)
강정화·최석기, 『지리산, 인문학으로 유람하다』(보고사, 2010)
최석기, 「남명의 산수유람에 대하여」(『남명학연구』5,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006)
강정화, 「19~20세기 강우학자의 지리산 인식과 천왕봉」(『한문학보』22, 우리한문학회, 2010)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한시(漢詩) 마당 ♣ > - 우리 漢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臨終偈 - 性徹 스님 (0) | 2018.06.14 |
---|---|
德山卜居 - 曺植 (0) | 2018.06.11 |
茶山花史. 18 -丁若鏞 (0) | 2018.06.09 |
茶山花史. 14-丁若鏞 (0) | 2018.06.08 |
盆池 -혜심(慧諶) (0) | 2018.06.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