踰鳥嶺
具鳳齡
旅 愁 京 洛 幾 年 春 (여수경락기년춘)나그네로 살아 온 서울살이 몇 해이던가
過 嶺 如 今 發 興 新 (과령여금발흥신)조령 넘는 지금 기분 상쾌하구나
自 從 踏 得 鄕 關 土 (자종답득향관토)이제부터 고향땅을 밟게 되나니
草 樹 相 看 亦 故 人 (초수상간역고인)마주보는 풀과 나무 또한 친구로세
京洛 : 임금의 궁성이 있는 곳(한양을 지칭)
如今 : 지금, 현재
自從 : 여기로부터
鄕關 : 고향
故人 : 옛 친구, 죽은 사람(여기서는 前者의 뜻)
어려서 外從祖(외종조) 權彭老(권팽로)와 三嘉 縣監 (삼가현감) 鄭以興(정이흥)의 門下에서 受業(수업)하였고, 인종 1년 20세에 淸凉山(청량산)에 들어가 退溪(퇴계)先生의 門下에서 수업하였다. 35세 9월, 別試 文科에 합격하여 12월에 承文院승문원) 權知(권지) 副正字(부정자)가 되었다.
이후 역임한 주요 관직으로는 예문관 검열, 홍문관 정자, 호조 좌랑, 병조 좌랑, 수찬, 예조 좌랑, 이조의 정랑, 교리, 직제학, 부제학, 동부승지 등을 역임하고 사간원,사헌부, 성균관으로 통칭 되는 삼사(三司)의 수장인 대사헌, 대사성, 대사간을 두루 역임하였다. 관직의 품계가 오르면서 이조참의, 충청도와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하였고, 만년에는 동지중추부사, 이조참판, 동지경연사, 예문관 제학 등의 관직을 거치며, 선조 19년에 61세로 별세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9년조에는 공의 일생에 대해 아래와 같은 기록을 남겼다.
전 대사헌 구봉령이 졸하였다. 자는 경서(景瑞)이고, 호는 백담(栢潭)이다. 안동(安東)에 살면서 이황을 사사(師事)하였는데 이황은 그를 문학과 덕행이 있다 칭찬하여 매우 중히 여겼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서 상례를 잘 거행하였고, 지극한 효성으로 조모를 섬겼으며, 임금과 스승의 상을 당하여서도 모두 예절을 따라 소식(素食)하였다. 성품이 충후(忠厚)하고 순근(純謹)하여 모나거나 기이한 것을 일삼지 않았고 문필(文筆)을 구비하였다. 젊어서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을 차지하였으므로 삼대(三代)의 인물이요 양한(兩漢)의 문장이라는 칭송을 받았었다. 조정에 들어온 뒤에 비록 묵묵히 안으로 감추기를 힘썼지만 명망은 남달리 성대하였다. 번갈아가며 대관(臺官)에 제수되어서는 논하고 아룀이 모두 강직하였고, 밖으로 나가 방백이 되어서도 명성과 치적이 또한 현저하였다.
벼슬길에 나서는 데에는 조급한 마음을 갖지 않아 관직이 제수될 때마다 곧 사양하였고 부득이한 뒤에야 명을 받았다. 사론(士論)이 분열될 때에도 중립을 지켜 한쪽으로 쏠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발(李潑)에게 꺼림을 받았고, 이어 당인(黨人)으로 지목을 받게 되자, 이로부터 관직에 제수되어도 일체 부임하지 않았다. 산간에 집을 지어 책을 갖추어 놓고 제자들을 가르치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존모(尊慕)
하여 섬겼으며,그가 죽은 뒤에도 조금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아 사당을 세워 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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