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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王維 詩意圖를 통해 본 朝鮮 文人들의 理想

Bawoo 2018. 7. 2.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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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維 詩意圖를 통해 본 朝鮮 文人들의 理想


조 인 희*


Ⅰ. 머리말
Ⅱ. 理想鄕과 理想像의 추구
  1. 桃源과 輞川- 이상향에 대한 동경
  2. 隱者의 삶 - 儒者의 지향
Ⅲ. 화면 표현의 특징
  1. 정형화된 도상의 실경 산수 표현
  2. 중국화보의 영향과 인물 표현의 변화
Ⅳ. 맺음말



Ⅰ. 머리말


唐代 王維(699~759)는 自然詩, 山水詩의 大家, 文人畵의 始祖로 평가받은 시인이자 화가이다.1) 그의 詩 「桃源行」과 ‘망천’에서 은거하며 지은 「終南別業」, 「積雨輞川莊作」, 「輞川閑居」,「田園樂」, 輞川集의 일련의 시 등은 조선시대 회화의 화제로 자주 사용되었다. 특히 ‘輞川’ 은 중국의 절경이자 최고의 은거지로 인식되며 문학, 회화 등에서 당시 문인들의 理想鄕과 理想像에 대한 문화적 지향을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현존하는 30여점의 왕유 시의도의 이러한 특징은 자연의 정취, 사계절의 감흥을 주로 표현했던 杜甫(712~770) 시의도와 내용상 차별화된 양상을 보인다.2)


일반적으로 이상향은 상상의 산물로 공간적인 표상을 드러낸다. 인간이 삶을 유지하는데 걱정, 근심이 없고 평화롭고 풍요로운 곳으로 사상, 종교에 따라 이상향의 형태는 조금씩 다를 수 있으나 인간이 행복한 곳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인간의 열망을 표현한 이상향은 시대에 따라 문인들의 주요 인식, 당시 추구되던 구체적 모습으로 문학과 회화 등에 지속적으로 표현되었다.

조선시대 회화의 경우 陶淵明(365~427)이 그의 작품 「桃花源記」에서 제시한 이상향을 그린 <桃源圖>같은 가상의 이상향은 물론 武夷九曲, 瀟湘八景 등의 중국 實景이 조선에서 이상향으로 기탁되며 그려지기도 했다.3) 또한 이상적인 인물상은 시대, 이념, 종교 등의 영향을 받으며 다양하게 제시된다. 궁극적으로 이상향에서의 삶은 이상적인 인물상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며 인간의 욕망을 표현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왕유의 시를 화제로 한 시의도는 조선시대 문인 사대부들의 지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동안 학계에 축적된 왕유 관련 논문들은 그의 문학과 회화관이 논의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왕유 시의도에 대한 논의는 현황에 대한 개괄적인 논의와 詩畵 관련논의가 있을 뿐이다.4) 따라서 본 글에서는 왕유의 「도원행」, 망천집의 일련의 시를 중심으로 이를 그리고 완상했던 조선 문인들의 이상향에 대한 인식, 「종남별업」 등을 화제로 그리며 지향했던 理想像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왕유 시의도의 내용과 회화적 특징에 관한 이 논의는 시의도를 통해 조선시대 문인들이 지향했던 理想에 대한 회화적 발현의 한 면을 밝힐 수 있
을 것이다.


* 서울대학교
1) 왕유는 全唐詩에 382수의 시가 실린 시인이다. 중국 詩壇에서는 陶淵明(365~427)의 전원시를 익혀 자연시를 개척한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망천도> 등을 그려 唐朝名畵錄, 歷代名畵記, 圖畵見聞誌 등에 이름을 올린 화가이다. 蘇軾(1037~1101)은 「書摩詰藍田烟雨圖」에서 “마힐의 시를 음미하면 시 속에 그림이 있고 마힐의 그림을 보면 그림 속에 시가 있다(味摩詰之詩 詩中有畵 觀摩詰之畵 畵中有詩)”라며 왕유의 작품은 詩畵一致를 이루었다고 평가했다. 이후 明代의 董其昌(1555~1636)은 그의 저술 畵旨를 통해 “문인화는 왕유의 그림으로부터 시작되었다(文人畵自王右丞始…)”라고 적어 왕유를 문인화의 鼻祖로 삼았다.
2) 두보 시의도는 왕유 시의도와 더불어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그려진 시의도이다. 두보 시의도의 유형과 특징에 관해선 조인희, 「조선 후기의 杜甫(712~770) 詩意圖」, 미술사학 28(한국미술사교육학회,2014), pp.97~128. 참조.

3) 이와 관련된 논문은 한정희, 「동아시아 산수화에 보이는 이상향」, 산수화, 이상향을 꿈꾸다(국립중앙박물관, 2014), pp.208~222. 참조.
4) 박은화, 「明代 後期의 詩意圖에 나타난 詩畵의 相關關係」, 미술사학연구 201(한국미술사학회, 1994), pp.75~101; 민길홍,「朝鮮後期 唐詩意圖의 硏究」(서울대학교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01); 김창경, 「왕유의 회화와 시가 - <망천도>와 <망천집>을 중심으로」, 동북아문화연구 제21집(동북아시아문화학회, 2009), pp.299~313; 조인희, 「조선후기 詩意圖 연구」(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3); 고연희, 「회화가 시문에 끼친 영향 - 망천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문화예술연구 제3집(동방대학원대학교, 2014), pp.145~176.



Ⅱ. 理想鄕과 理想像의 추구


1. 桃源과 輞川 - 이상향에 대한 동경


조선시대에 문인들에게 중국의 絶景은 문학 작품 등을 통해 인식된 후 문학적 상상이 더해져 憧憬의 대상이 되었다. 더 나아가 쉽게 가지 못하는 현실적 제약과 맞물리며 이상향으로 기탁해 지향되기도 했다. 왕유의 「도원행」과 망천집의 일련의 시들을 화제로 하는 시의도는 이러한 조선 문인들의 이상향에 대한 동경을 보여준다. 가상의 이상향인 ‘桃源’과 중국의 실경에서 이상향으로 기탁된 ‘輞川’이 그것이다.


왕유의 「도원행」은 도연명의 「도화원기」를 재해석한 것이다. 따라서 문학적 측면에서는 ‘桃源’이란 상상 속의 이상향을 읊었다는 점에서 두 작품이 동일하게 인식되었다. 「도화원기」, 「도원행」을 화제로 한 회화의 경우도 ‘도원’이란 理想鄕의 시각적 표현에 정형화가 이루어져 이같은 동일화를 더욱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5)

陶淵明의 「桃花源記」와 王維의 「桃源行」을 화제로 한 <도원도>가 실린 여러본의《 千古最盛帖 》임모본과《 萬古奇觀帖》에 실린 <무릉심원도>는 동일한 화면 구성, 인물 도상등으로 표현되어 있다.6)

《 千古最盛帖 》임모본 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李匡師 本과 선문대 소장本은 陶淵明의 詩, 국립중앙박물
관 소장의 趙斗壽 本은 王維의 詩가 화제로 적혀 있다.

반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尹得和 本(도 1)은 陶淵明의 시 「도화원기」와 王維의 詩 「도원행」을 모두 적고 있어 시에 따른 화면의 구성보다는 ‘桃源’으로 정형화된 도상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 萬古奇觀帖》에 수록된 화원 韓後良(생몰년 미상, 17세기 후반~18세기 초반 활동)의 <武陵尋源圖>(도2)의 화면구성 또한 앞서 언급한 작품들과 유사해 주목된다. 王維의 詩를 화제로 한 韓後良의 이 작품에는 화면 우측하단에 桃源으로 들어가는 동굴이 묘사되었고 어부를 맞는 도원의 사람들과 분홍 桃花가 핀 나무를 화면 중앙에 그렸다. 또한 화면 원경에 이들을 둘러 싼 듯한 산봉우리를 표현했다. 한후량의 작품은 필선을 줄이고 경물을 청록색으로 강조한 특징을 보인다.


도 1. 千古最盛帖』중 윤득화 本 <桃源圖>, 18세기, 견본채색, 26.2×32.9cm, 국립중앙박물관


도 2. 韓後良, 萬古奇觀帖』중 <무릉심원도>, 18세기, 지본채색, 38.0×30.0cm, Leeum.


5) 도연명의 「도화원기」와 왕유의 「도원행」 등 도원을 이상향으로 그린 일련의 <도원도>는 특히 명대 중기 이후 강남 지역에서 널리 그려졌다. <도원도>는 내용의 전개에 따라 세부적인 내용을 충실하게 표현한 횡권형식과 도원으로 진입하는 모습과 같이 특정한 장면을 그린 것으로 나눌 수 있다. 한정희,앞의 논문, p.212.
6) 《 천고최성첩》은 1606년 명나라 사신인 朱之蕃(1546~1624)이 조선에 전래 한 것이다. 중국 吳派의 특징과 화풍으로 중국의 유명 詩文을 화제로 그린 것으로 국내에는 이를 임모한 본들이 여러 본 현존한다.

《 만고기관첩》도 왕실에서 유명 시문을 감상하고 학습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시화합벽첩이다. 이와 관련된 상세한 내용은 유미나, 「中國詩文을 주제로 한 朝鮮後期 書畵合璧帖」(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6) 참조. 본 글에서《 천고최성첩》 임모본에 대한 명칭은 유미나의 논문을 따랐다.



이상의 논의처럼 왕유의 「桃源行」 全文을 화제로 적은 것과는 달리 일부 구절을 화면 안에 화제로 적고 그린 다른 유형은 鄭敾, 金喜誠, 金允謙의 시의도에서 찾을 수 있다.

鄭敾(1676~ 1759)의 <樵客初傳>(도 3)은 「도원행」 중 “나무꾼이 처음에는 한나라 성명을 전한다(樵客初傳漢姓名)”라는 구절이 화제이다. 부감법으로 산속의 집들과 밭을 그리고, 인물들의 행동 표현을 통해 화제를 묘사하고 있다. 이밖에도 鄭敾의 <月明松下>는 「도원행」 중 “달은 소나무 아래에 밝아 창문가로 조용하다(月明松下房櫳靜)”라는 구절을 화제로 그려졌다.

金喜誠의 <무릉도원도> 두 점과 김윤겸의 <도원도>도 왕유의 「도원행」을 화제로 했다. 김희성의 작품 두 점은 각각 “나무꾼이 처음에는 한나라 성명을 전한다(樵客初傳漢姓名)”라는 구절과 “다투어 집으로 데려가 고향
마을 소식을 묻는다(競引還家問都邑)”라는 구절(도4)을 화제로 했다.

반면 김윤겸의 <도원도>는 「도원행」 중 “동굴을 나와서는 산과 물 건너는 것을 가리지 않았다(出洞無論隔山水)”라는 구절이 화제이다. 이를 통해 볼 때 鄭敾, 金喜誠, 金允謙의 詩意圖는 「도원행」의 내용을 여러 폭으로 나누어 그린 것 중의 일부이거나 특정 구절만을 그린 것으로 볼 수있다.


도 3. 鄭敾, <樵客初傳>, 견본담채, 29.0×19.0cm, 개인소장


도 4. 金喜誠, <武陵桃源圖 2>, 지본채 색, 36.5×28.2cm, 개인소장



다음은 왕유의 輞川集에 실린 시를 화제로 ‘輞川’이란 중국 실경을 이상향으로 삼은 조선 문인들의 인식과 회화적 표현을 알아보겠다.7) 輞川은 중국의 長安 남쪽 終南山 자락의 지역으로 王維가 은거를 할 때 창작한 시와 그림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 왕유는 돌아간 어머니를 위해 망천장을 淸源寺로 바꾸고 벽면에 망천의 승경을 그림으로 그렸다. 왕유의 <망천도>에 대해 唐代 張彥遠(815~879)은 歷代名畵記에 “淸源寺벽위에 그린 <輞川圖>의 필력이 웅장하다(淸源寺壁上畵輞川筆力雄壯)”고 적고 있다.8)

또한 宋代의 宣和畵譜에는 자신의 詩情을 시원하고 대범한 畵意로 옮긴 왕유의 <망천도>를 언급하며 원본이 유실됨을 안타까워하는 내용도 보인다.9)


이러한 ‘망천’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인식되었고 조선 문인들도 소상팔경, 무이구곡과 더불어 알고 있던 중국의 勝景이다.10) 李植(1584~1647)은 자신의 시에 “빼어난 경치 읊은 서른개의 노래를 지어 왕망천의 옛 고사를 본떠 보려 한다(將題三十景 欲擬王輞川)”11)고 읊어 망천은 곧 절경이란 인식을 보여준다. 이러한 절경을 그린 그림을 완상하는 것에 대해 柳希春(1513~1577)은 “격문 읽은 것도 두풍을 낫게 하고 <망천도>도 사람의 병을 낫게 한다(讀檄尙可愈頭風 輞川圖亦平人癏)”12)고 하였다.

李明漢(1595~1645)은 “왕유의 망천장이 산거하기에 가장 좋은 경치인 것을 당송대의 여러 시인들의 노래를 통해 잘 알고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천하의 보배로 여기는데, 나는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하여 이를 늘 한탄하였다. … 화가 李澄에게 수묵 <망천도> 제작을 요구했고 李澄은 중국 <망천도>를 보았던 기억을 바탕으로 4폭
의 <망천도>를 그렸다”13)는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아 이미 조선 중기에는 왕유의 망천장을 산거하기에 좋은 절경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중국 본을 바탕으로 그려졌음도 알 수 있다. 이같이 경치가 좋은 망천이라는 인식은 당시 성행했던 와유 문화의 유행 풍조, 문인들의 산수에 대한 인식의 변화 등과 중첩되며 단순한 중국의 실경이 아닌 이상향, 은거지로 전이되어 화면에 그려지고 완상되었다.


왕유의 輞川集 중 孟城坳, 輞口莊, 文杏館, 宮槐陌, 鹿柴, 北垞, 臨湖亭, 南垞, 竹里館, 椒園 등 10景을 읊은 시의 詩情은 李昉運(1761~1815 이후)의 《 輞川十景圖 》10폭의 화제이다. 다만 제2폭인 <輞口莊>의 화제는 왕유의 「積雨輞川莊作」 全文이다. 또한 <맹성요>, <궁괴맥> 등 일부 작품은 裴迪의 詩 중 일부 혹은 全文이 화제이다. 이중 제7폭 <臨湖亭>(도5)은 왕유의 輞川集 중 <임호정> 全文인 “귀한 손님 맞이하러 날렵한 배 띄우고/ 한가로이 물위로 손님 모셔온다/ 창 열고 잔에 술 채워 마주 앉고 보니/ 사방에 고운 연꽃이 활짝 피었다(輕舸迎上客  悠悠湖上來  當軒對樽酒  四面芙蓉開)”를 화제로 하였다.

이방운은 화면을 수평의 구도로 구획하여 화면 전면에는 버드나무가 늘어진 강변, 화면 후면에 임호정을 그려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호수의 평온함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또한 두 인물이 마주 앉은 정자,3척의 배, 강가의 연꽃 등을 그리고 담채하여 평화로운 초여름 일상을 읊은 화제의 詩情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외의 나머지 9폭도 이방운의 간일한 필체와 담채를 통해 화면에 적은 화제를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왕유의 시 「도원행」과 망천집에 실린 시를 화제로 하는 시의도는 가상의 이상향인 ‘桃源’과 중국의 실경에서 이상향으로 기탁된 ‘輞川’의 표현을 통해 조선 문인들의 이상향에 대한 동경을 보여준다.


도 5. 李昉運, 《 輞川十景圖 》 중 <임호정>, 지본담채, 27.3×30.5cm,홍익대박물관


7) 輞川集은 輞川주변의 草堂, 精舍, 竹林, 果樹園 등 20곳의 勝景에 이름을 붙이고 친구 裴迪(716~?)과 酬唱한 5언 절구의 연작시를 묶은 것으로 輞川集幷序, 輞川二十景, 輞川二十首라고도 알려져 있다. 舊唐書 「王維傳」에는 “(왕유는) 말년에 오랫동안 재계하고 무늬 있는 옷을 입지 않고 輞口에 있는 宋之問의 藍田別墅를 얻어 살았다. 거처 아래로 輞水가 둘렀고 또 대나무 섬과 화오에는 물이 넘쳐 흐르고, 도우 裵迪과 배를 저어 왕래하면서 거문고 타며 시를 지어 하루 종일 읊었다. 그 내용을 시로 지어 輞川集을 엮었다.(晩年長齋 不衣文綵 得宋之問藍田別墅在輞口 輞水周於舍下 別漲竹洲花塢與道友裵迪浮舟往來 彈琴賦詩 嘯詠終日嘗聚其田園所爲詩 別爲輞川集)”고 기록되어 있다. 舊唐書권190下(中華書局, 1995), p.5052.
8) 張彥遠, 歷代名畫記 권10(中華書局, 1985), p.307.
9) “…(왕유는) 망천에 거처를 정하였는데 이 또한 망천도 속에 있다. 이는 그 가슴 속에 있는 것이 자연스럽고 대범하였는데, 그 뜻을 화폭에 옮겨 놓았으니, 다른 이를 뛰어넘음은 당연한 것이다. 심히 애석한 것은 戰禍로 말미암아 몇백년 동안 유리되다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 이 후 그 모사본을 얻게 되었는데 凡俗을 초월한 듯 하였다.”(至其卜築輞川 亦在圖畵中 是其胸次所存 無適而不潚灑 移志之於畵 過人宜矣 重可惜者 兵火之餘 數百年間而流落無幾 後來得其髣髴者 猶可以絶俗也) 宣和畫譜 권10, <山水一> 王維條(中華書局, 1985), pp.258~261. 이후<망천도>는 五代 郭忠恕(?~977)가 모사했고, 北宋代 李公麟(약 1041~1106)에 의해 재현되었다. 이같은 내용과 현존하는 <망천도>에 대한 종류에 관한 내용은 고연희, 앞의 논문, pp.149~150 참조. 왕유의 망천집과 <망천도>에 대한 唐宋代 문인들의 인식에 관해선 紺野達也, 「王維 輞川集と「輞川圖」の唐宋期ににおける評價の變遷」, 日本中国學會報61집(日本中国學會, 2009), pp.59~73 참조.
10) 조선에서의 중국 실경에 대한 이상향으로의 인식 전환과 문학적, 회화적 표현의 정착은 무이구곡과 소상팔경의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다. 소상팔경의 경우 屈原(기원전 약 343~278년경)이 자신의 불우한 정치적 상황을 읊었던 곳인데 점차 이상화하며 산수미의 전형으로 인식전이가 이루어졌다.
(Alfreda Murk, “Eight Views of the hsiao and Hsiang River by Wang Hung,” Image of the Mind(New Jersey: Princeton University), pp.214~217.) 또한 시와 그림으로 확대 재생산되며 유토피아적 상상력이 가미된 공간이라는 소상팔경의 관념성을 획득했고 조선 전 기간을 걸쳐 지속적으로 소비된 것은 문화적 주체가 문인 사대부였기 때문이다.(김인숙 김태순, 「소상팔경도의 장소성에 관한 연구」, 기초조형학회 Vol.14 No.3(한국기초조형학회, 2013), p.68) 무이구곡은 주희가 은거하며 강학하던 곳으로 주자성리학을 치국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에서 존숭하는 인물의 학통을 계승하면서 이상화되었다. 따라서 무이구곡은 조선 문인들에게 도학의 실현처이며 또 다른 이상향으로 여겨졌다.
11) 李植, 澤堂集 권6, 「具主簿鎣挽」 중 부분.
12) 柳希春, 眉巖集 권1 「門人作詩賀余病愈謝以詩」 중 부분. 이는 宋代의 문인 秦觀이 객지에서 병들어 누워 있을 때, 知人이 보여 준 王維의 <망천도>를 보고 마치 왕유와 함께 망천에서 차를 마시고 글을 짓는 듯 한 느낌을 받고는 며칠 만에 병이 나았다고 하는《緯略》卷6의 기록을 典據로 지어진 것이다.

13) 李明漢, 白洲集 卷16, 「稧屛後跋」 참조.



2. 隱者의 삶 - 儒者의 지향


문인 사대부 삶의 가장 큰 목표와 역할은 관직에 나아가 벼슬을 하고 임금을 섬기며 백성의 안위를 위하는 立身揚名에 있었다. 이러한 지향의 성취는 물론 개인적 역량에 의존하는 것이었지만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정치적, 사회적 소용돌이에서는 물러나 때를 기다리는 삶이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천하에 道가 행해지면 관직에 나아가고 道가 행해지지 않으면 숨는다(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14),

“궁색할 때는 홀로 수양하는데 주력하고, 패가 잘 풀릴 때에는 천하에 나가 좋은 일을 한다(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15), “군자의 길은 나아갈 수도 있고 물러날 수도 있다(君子之道 或出或處 或黙或語)”16)는 사상가들의 논지는 이러한 삶의 지침이 되었다. 이같은 은거와 은자의 삶은 춘추전국시대 이래 형성되어 시대를 막론하고 지속된 문인사대부들의 또 다른 지향이었다.


특히 왕유가 살았던 성당시대에는 出仕를 준비하거나 혹은 관직 생활에서 좌절을 겪고 실의를 달래기 위한 隱居, 隱逸의 풍조가 더욱 성행하였다. 20여년에 걸친 왕유의 은거, 특히 종남산과 망천 등에서의 14년 은거는 왕유의 삶과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17) 이후 蘇軾(1036~1101)이 망천의 풍취와 정신 세계를 높히고 朱子語錄에 거론하며 망천은 ‘隱居’와 ‘별장’의 대명사가 되었다.18)


‘망천’을 은거지로 인식한 예는 고려시대 李穡(1328~1396)의 글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의 시 「兔郞游山後別墅」에는 “긴 냇물은 응당 망천과 비슷하고 깊은 골은 반곡이라 칭할 만하다(長川應像輞 深谷可名盤)”19)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唐代 李愿(?~762)이 은거하던 太行山남쪽의 盤谷과 왕유가 은거하던 망천을 대비시키며 반곡, 망천과 같은 중국 절경을 은거지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문인들도 명예와 부를 뒤로하고 탈속한 은자의 삶, 자연에서의 隱居를 동경했다. 도연명과 왕유의 삶은 그들이 추구하는 삶의 지표처럼 여겨졌고 그들의 詩가 애송되었다. 도연명과 왕유의 詩句를 중심으로 은거하는 문인의 삶과 서정을 표현한 시의도가 그려진 것은 이 같은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도 6. 尹斗緖,《 貫月帖 》 중 <坐看雲起時>, 견본수묵, 尹斗緖, 貫月帖  坐看雲起時
19.1×14.9cm(그림부분), 국립중앙박물관


왕유의 시 「終南別業」은 그의 나이 40세 무렵 종남산에서 산수를 감상하고 소요 자적하는 은거 생활 중에 지어졌다. 이 시는 자연에 대한 흥취와 탈속의 정취를 표현한 것으로 일체를 자연에 맡겨 마음에 두지 않는 생활을 표현했다. 「終南別業」 중 “가다가 물이 끝나는 곳에 이르면/ 앉아서 구름 이는 그 때를 바라본다(行到水窮處 坐看雲起時)”라는 구절은 여러 글에서 詩情이 뛰어난 구절로 언급되었다.20)

이 구절은 조선 화단에서도 그 어느 唐詩보다도 은일자의 삶을 묘사하는, 畵意에 적합한 시로 인식되어 詩意圖의 화제로 꾸준히 애용되었다.
尹斗緖(1668~1715)의 貫月帖에 실린 <坐看雲起時>(도 6)는 「終南別業」 중 “흥이 나면 자주 홀로 오가며/ 좋은 일도 그저 혼자 알뿐이다/ 가다가 물이 끝나는 곳에 이르면/ 앉아서 구름 이는 그 때를 바라본다(興來每獨往 勝事空自知 行道水窮處 坐看雲起時)”를 화제로 한 詩意圖이다.21)

윤두서는 화첩 한 면에 예서체로 화제를 적었다. 화면 중앙의 나무 밑에는 ‘홀로 찾아가 앉아서 구름이 이는 그 때’를 바라보고 있는 인물이 묘사되어 있는데 오른쪽 다리를 접어 왼쪽 다리 위에 얹고 두 손을 깎지끼어 감싸고 있다. 그윽하게 먼 곳을 응시하는 듯한 인물의 표정, 세심한 자세 묘사로 탈속적이고 고아한 태도를 표현하고 있다. 화면 하단에 공간을 구획한 듯 그어진 선과 前面의 돌 표현을 통해 잔존하는 조선중기 절파 화풍을 찾을 수 있다. 尹斗緖의 이같은 인물표현은 시의 내용을 숙지한 그가 자신만의 개성적인 화면으로 詩情을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22)


도 7. 鄭敾, <坐看雲起>, 지본담채, 19.8×32.3cm, 개인소장


鄭敾의 <坐看雲起>(도 7)는 간략히 표현된 두 명의 인물이 산수를 배경으로 담소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윤두서의 시의도 형식과는 달리 화면 안의 좌측 상단에 화제인 “가다가 물이 끝나는 곳에 이르면/앉아서 구름 이는 그 때를 바라본다”라는 구절을 적었다. 화면 우측에 부벽준을 힘차게 내려 그린 절벽, 바위의 표현과 主山의 米點, 인물 표현을 통해 조선중기의 절파 화풍과 후기의 남종화풍이 공존하는 전환기적 작품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도 8. 金弘道, <山居閑談>, 지본담채, 23.5×27.5cm, 개인소장


도 9. 金弘道, <高士觀水圖>, 지본담채, 29.5×37.9cm, 개인소장


金弘道(1745~1806 이후)의 <山居閑談>(도 8), <高士觀水圖>(도 9)는 鄭敾의 작품과 동일한 구절의 화제를 그린 시의도이다. 김홍도는 마주 앉은 두 인물이 산속의 물길이 시작되는 곳에 가서 閑談을 나누는 모습으로 詩意를 표현하고 있다. <산거한담>의 경우 물길이 시작되는 곳에 가서 한담을 나누는 두 인물 표현에 중점을 둔 듯 화면에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강조했다. 반면 <고사관수도>의 경우 인물이 위치한 곳이 높은 곳임을 암시하듯 화면의 위쪽에 인물을 그리고 하단에 여백을 주고 있다. 멀리 구름이 이는 것을 앉아서 보기 좋은 위치임을 표현한 것이다.


도 10. 金弘道, <南山閑談>, 지본담채, 29.4×42.0cm, 개인소장


도 11. 李寅文, <松下談笑圖>, 지본담채, 121.2×53.2cm, 국립중앙박물관


화면의 유사성은 金弘道의 <남산한담>(도 10)과 李寅文(1745~1821)의 <松下談笑圖>(도 11)에서도 찾을 수 있다. 두 작품은 앞서 논의한 시의도와는 달리 화면에 <종남별업>의 全文을 화제로 적고 있다.

金弘道의 <남산한담>은 화면을 사선으로 분할하고 산 중턱에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는 인물을 화면의 중앙에 표현하고 있다. 반면 李寅文의 <松下談笑圖>에는 老松 밑에 마주 앉은 인물들이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23)


14) 論語, <泰伯>편
15) 孟子, <注疏>편
16) 周易, <正義>편
17) 왕유의 시에 보이는 출사와 은거의 갈등은 전영실, 「王維詩에 나타난 詩人의 隱逸과 官職에의 모순된 感情 硏究」, 중국연구 제50권(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연구소, 2010), pp.193~213 참고.
18) 고연희, 앞의 논문, p.149.
19) 李穡, 牧隱詩藁 권10, 「兔郞游山後別墅」 중 부분.

20) 宣和畫譜 권10 <왕유 조>에 특히 “行到水窮處 坐看雲起時” 구절에 畵意가 있다고 적고 있다(중화서국, 1985), p.259. 北宋代 화가인 郭熙, 郭思 父子가 엮은 林泉高致에 사람의 내면을 잘 드러낸 16편의 詩句 중의 하나로 소개되었다.(郭熙 郭思, 林泉高致, 文淵閣四庫全書 812, 子部(118)(臺灣 商務印書館, 1983), p.46) 북송대 李公麟이 <寫王維看雲圖>를 그렸다는 기록이 있으나 작품은 남아있지 않다.(宣和畫譜 권7) 현존하는 작품 중 이 구절을 그린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으로는 南宋代畵員인 馬麟(13세기에 활동)의 扇面 <坐看雲起圖>(미국 클리브랜드 박물관 소장)를 들 수 있다. 이후 元代의 盛懋와 明代의 錢貢도 <坐看雲起圖>를 그려 이 구절은 중국에서도 오래전부터 왕유의 名句로 주목받으며 시의도로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21)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중년의 나이부터 불도를 좋아하여/ 늙어서는 종남산의 기슭에다 집을 짓고/ 흥이 나면 자주 홀로 오가며/ 좋은 일도 그저 혼자 알 뿐이다/ 가다가 물이 끝나는 곳에 이르면/ 앉아서 구름 이는 그 때를 바라본다/ 어쩌다가 산에 사는 늙은이를 만나면/ 이야기를 즐기다가 돌아갈 줄 모른다.

(中歲頗好道 晩家南山隧 興來每獨往 勝事空自知 行道水窮處 坐看雲起時 遇然値林叟 談笑無還期)” 全唐詩 권126.

22) 尹斗緖 詩意圖에 대해서는 박은순, 공재 尹斗緖(돌베개, 2010), pp.161~165; 조인희, 「詩情을 畵意로 펼친 尹斗緖 一家의 繪畵」, 溫知論叢 제32집(온지학회, 2012), pp.46~51 참조.

23) 李寅文의 <松下談笑圖>에 쓰인 화제의 전문은 金弘道가 행초서로 쓴 것이다.


도 12. 李命基, <草堂讀書圖>,지본담채,103.8×48.5cm, 삼성미술관Leeum


도 13. 李命基, <倚杖出門圖>,지본담채,90.5×40.5cm, 개인소장


도 14. 李命基, <柳下士人圖>,지본담채, 90.5×40.4cm, 개인소장



李命基(생몰년 미상, 18세기 활동)가 그린 일련의 왕유 시의도는 세속의 명예와 부를 뒤로 하고 은거하며 文人의 삶과 정서를 읊은 시를 화제로 하고 있다.

<草堂讀書圖>(도 12)는 왕유의 시 「春日與裴迪過新昌裏訪呂逸人不遇」 중 “문 닫고 독서로 오랜 시간을 보내니/ 소나무가 모두 늙은 용 비늘이 되었다(閉戶著書多歲月 種松皆老作龍鱗)”라는 구절을 화제로 했다.24)

이명기는 화면 가득 수령이 오래된 소나무 두 그루와 草堂에서 한가로이 글을 읽는 인물을 그려 화제의 詩情을 충실히묘사했다.

<倚杖出門圖>와 <柳下士人圖>는 王維의 시 「輞川閑居贈裵秀才迪」을 화제로 했다.25)

<倚杖出門圖>(도 13)는 “추운 산은 갈수록 푸르고/ 가을 시냇물 날마다 소리내어 흐른다/ 지팡이 짚고 사립문 밖에 서서/ 바람 맞으며 저녁 매미소리를 듣는다(寒山轉蒼翠 秋水日潺湲 倚杖柴門外 臨風聽暮蟬)”라는 구절이 화제이다. 이명기는 화제를 충실히 표현한 듯 화면 근경에는 지팡이를 짚고 사립문 앞에 서 있는 인물을 중심에 그려 놓았다. 화면 원경에는 단정한 필치로 그린 主山과 시냇물을 그렸는데, 이를 통해 이명기가 詩意를 표현하기 위해 詩句에 언급된 사물들을 화면 곳곳에 배치해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柳下士人圖>(도14)는 시의 다음 구절인 “나루터에 남아있는 저녁 노을/ 마을에는 외로운 연기 피어오른다/
다시 접여같은 이를 만나 취하면/ 오류선생 앞에서 미친 듯 노래하리라(渡頭餘落日 墟裏上孤煙 復値接輿醉 狂歌五柳前)”라는 구절을 화제로 한 詩意圖이다.

이명기는 화면 전면에 버드나무를 그리고 시동과 더불어 앉아 있는 인물을 묘사했다. 특히 詩句 중 五柳先生은 陶淵明을 말하며 화면에 표현된 버드나무가 이를 상징한다.26)


24)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곧장 가면 무릉도원, 바람과 먼지 끊기고/ 버드나무 서 있는 남쪽어귀에는 잔잔한 물/

문에 닿았으나 감히 새떼에게 말 붙이지 못하고/ 대나무 바라보며 주인에게 묻는다/

성위의 푸른 산은 지붕과 같고/ 동쪽 집의 물은 서쪽으로 흘러든다/

문닫고 독서로 오랜 시간 보내니/소나무가 모두 늙은 용비늘이 되었다.

(桃源一向絶風塵 柳市南頭訪隱淪

到門不敢題凡鳥 看竹何須問主人

城上靑山如屋裏 東家流水入西鄰

閉戶著書多歲月 種松皆老作龍鱗)” 全唐詩 권128.
25)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추운 산은 갈수록 푸르고/ 가을 시냇물 날마다 소리내어 흐른다/

지팡이짚고 사립문 밖에 서서/ 바람 맞으며 저녁 매미소리를 듣는다/

나루터에 남아있는 저녁 노을/ 마을에는 외로운 연기 피어오른다/

다시 접여같은 이를 만나 취하면/ 오류선생(陶淵明) 앞에서 미친 듯 노래하리라.

(寒山轉蒼翠 秋水日潺湲

倚杖柴門外 臨風聽暮蟬

渡頭餘落日 墟裏上孤煙

復値接輿醉 狂歌五柳前)” 全唐詩 권126.

26) 이명기의 詩意圖 <柳下士人圖>와 <倚杖出門圖>는 동일한 시의 다른 구절을 화제로 했다는 점, 작품의 규격, 재질, 화풍 등의 공통점을 들어 한 벌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張寅昔, 「華山館 李命基 繪畵에 대한 硏究」(명지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08), p.64.



도 15. 金弘道, <竹里彈琴圖>, 지본수묵, 22.4×54.6cm,고려대박물관


앞서 살펴본 <망천도>가 조선 문인들의 이상향에 대한 표현이었다면, 김홍도의 <죽리탄금도>(도 15)는 은거하는 문인 삶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망천집 중 한 수인 <죽리관>을 화제로 한 시의도이다.27) 김홍도는 시의 全文을 화면 우측에 적고 대숲에 앉아 거문고를 타는 인물과 뒤편에서 차를 다리는 시동을 그려 놓았다.
텅 빈 충만함으로 묘사되는 달과 인간의 교감은 혼탁한 인간 세상을 등지고 산속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인물과
만나는 순간 이루어진다. 또한 속이 빈 대나무에 둘러 싸였다는 것은 虛心한 은일자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며 詩情을 고취시키는 듯하다. 여기에 彈琴은 달과 인물이란 시각적 이미지와 더불어 음악이란 청각적 표현이 더해져 知音이란 조화와 융화를 상징하고 있다.


27)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그윽한 대숲에 홀로 앉아/거문고 타고 긴 휘파람을 분다/

깊은 숲을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데/밝은 달만이 와서 비춘다.

(獨坐幽篁裏 彈琴復長嘯 深林人不知 明月來相照)” 全唐詩 권128.



도 16. 姜世晃, 《 四時八景圖 》중 <晩春>, 1760년, 견본담채,90.3×45.5cm, 국립중앙박물관


이밖에도 은거지의 모습은 왕유의 시 「田園樂」을 화제로 하는 시의도에서 찾을 수 있다. 「田園樂」은 전원에 사는 즐거움을 읊은 7수의 연작시이다. 姜世晃(1713~1791)의 《 四時八景圖 》 중 <晩春>(도 16)은 「田園樂」
의 다섯 번째 시의 첫 구절인 “산 아래 먼 마을에서 이는 가는 연기(山下孤烟遠村)”를 화제로 적고 있다.28)

前景의 나무 아래 가옥과 인물, 中景의 넓은 강물, 遠景의 主山과 마을 표현은 강세황이 주로 그리는 화보풍의 산수 풍경이다. 이러한 구도는 평면적인 화면에 깊이를 더하며 화면의 확장을 이루어내는 전통적인 방식이다. 이같은 구도를 통해 강세황은 ‘산 아래 먼 마을’이라는 화제가 된 詩句를 표현하려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는唐詩畵譜에 <幽居>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28)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산 아래 먼 마을에서 이는 가는 연기/ 하늘가 높은 언덕에는 나무가 홀로서 있다/

안빈낙도하는 안회가 사는 누추한 동네/ 고결한 성품의 오류선생(陶淵明)이 맞은 편 집에산다.

(山下孤烟遠村 天邊獨樹高原 一瓢顔回陋巷 五柳先生對門)” 全唐詩 권128.



도 17. 金弘道, <樹下午睡圖>, 지본담채,28.4×49.5cm, 삼성미술관Leeum


김홍도의 <樹下午睡圖>(도 17)는 「전원락」의 여섯 번째 시 중 “복숭아꽃은 지난 밤 내린 비를 머금어 붉고/ 버드나무는 아침 연기를 띄우며 푸르다(桃紅復含宿雨 柳綠更帶朝煙)”라는 구절이 화제이다.29)

김홍도는 화제인 詩句의 표현으로 자욱한 안개와 봄 물이 오른 버드나무를 묘사하고 있다. 버드나무 곁에서 잠을 자는 인물의 묘사는 화면에 화제로 적지는 않았으나 시 전문의 내용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대각선으로 배치한 경물에 비해 화면 좌측단의 화제가 다소 크게 쓰인듯하나 이러한 화면의 불균형은 버드나무를 가로 지른 짙게 깔린 안개의 표현으로 극복하고 있다.


29) 「전원락」 중 여섯 번째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복숭아 꽃은 지난 밤 내린 비를 머금어 붉고/버드나무는 아침 연기를 띄우며 푸르다/

떨어진 꽃잎을 아이는 아직 쓸지 않고/ 앵무새도 우는데 손님은 아직 꿈결

(桃紅復含宿雨 柳綠更帶春煙 花落家童未掃 鶯啼山客猶眠)” 詩句 ‘柳綠更帶朝’ 중 ‘朝’는 원문에는 ‘春’으로 적혀 있다. 全唐詩 권128.


도 18. 鄭敾, <黃驢湖>, 1732년,견본담채, 102.0×52.0cm, 개인소장


왕유의 시 「積雨輞川莊作」은 비온 후 망천의 경치와 청담한 생활, 조용하고 평화로운 전원 풍경을 읊은 시이다.30)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비온 후의 망천장의 풍광을 읊으며 隱居하며 안빈낙도하는 儒者의 여름나기를 묘사하고 있다. 특히 마지막 두 구절은 出仕의 뜻을 접은 隱者의 의지를 보여 주목된다. 이 시를 화제로 하는 시의도는 鄭敾, 沈師正, 李昉運의 작품이 있다. 鄭敾의 <황려호>(도 18)는 “아득한 논에 백로가 날고/그늘 짙은 여름 숲에는 꾀꼬리가 지저귄다(漠漠水田飛白鷺 陰陰夏木囀黃鸚)”라는 구절을 화제로 했다.

 정선은 비 온 후의 망천장을 표현하듯 습윤한 붓으로 전경의 나무를 그리고 산등성이는 짙은 먹을 써 여름의 녹음을 묘사했다. 세밀한 필선으로 묘사된 산줄기와 마을, 물가를 잇는 부드러운 곡선이 차분한 여름 산수의 면모를 보여준다. 특히 米點, 수지법 등으로 완숙해진 남종화풍을 구사하고 있다.


30)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장맛비 빈 숲에 연기 피어 오르더니/명아주 찌고 기장밥 지어 동쪽 밭으로 내어간다/

아득한 논에 백로가 날고/ 그늘 짙은 여름 숲에는 꾀꼬리가 지저귄다/

산속에 좌정하여 아침 무궁화를 관조하고/소나무 밑 맑은 집에서 아욱 뜯어 먹고 산다/

시골 노인네 자리다툼 그만 두었거늘/ 갈매기는 어이해서 의심의 눈길 못 거두는가.

(積雨空林烟火遲 蒸藜炘黍餉東菑

漠漠水田飛白鷺 陰陰夏木囀黃鸚

山中習靜觀朝權 松下淸齋折露葵

野老與人爭席罷 海鷗何事更相疑)” 全唐詩 권128.



도 19. 沈師正, <山水圖>, 견본담채,20.6×14.8cm,국립중앙박물관


沈師正(1707~1769)도 동일한 구절을 화제로 한 <산수도>(도 19)를 그렸다. 습윤한 나무 사이에 가옥을 그리고 원경에 주산을 묘사한 것은 鄭敾의 <황려호>와 구도적 유사성이 보인다. 정선의 필치에 비해 간일하지만 심사정은 화제가 되는 시구를 화면 상단 중앙에 적으며 畵意를 더하고 있다.



도 20. 李昉運, <輞川別墅圖>, 지본담채, 45.0×35.0cm, 개인소장


도 21. 李昉運, <夏景山水圖>,지본담채,107.3×54.5cm,고려대박물관


李昉運의 <망천별서도>(도 20)와 <하경산수도>(도 21) 역시 「積雨輞川莊作」을 화제로 隱居地의 여름 서정을 표현하고 있다. <망천별서도>는 시의 전문을 화면 상단에 적으며 산수와 어우러진 別墅를 그렸는데, 역시 시의 전문을 화제로 적은 이방운의 《망천십경도》중 <망구장>(도 23)과 화면상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즉 <망구장>에서 묘사된 정면상의 가옥은 <망천별서도>에서 측면상으로 변화되었고, 산수 표현이 더해지며 화면을 풍성하게 했을 뿐 기본적인 화면 구도는 동일함을 알 수 있다.

<하경산수도>는 시의 전문 중 “장맛비 빈 숲에연기 피어 오르더니/명아주 찌고 기장밥 지어 동쪽 밭으로 내어간다/아득한 논에 백로가 날고/ 그늘 짙은 여름 숲에는 꾀꼬리가 지저귄다/산속에 좌정하여 아침 무궁화를 관조하고/소나무 밑 맑은 집에서 아욱 뜯어 먹고 산다(積雨空林烟火遲 蒸藜炘黍餉東菑 漠漠水田飛白鷺 陰陰夏木囀黃鸚 山中習靜觀朝權 松下淸齋折露葵)”는 구절을 화제로 했다.

여름의 망천장 주변 풍광과 안빈낙도하는 隱逸者를 묘사하는 구절만을 화제로 했는데 녹음이 우거진 자연과 풍부한 물의 표현을 통해 은거지의 평화로움을 보여주고 있다.



도 22. 李昉運, <輞川閑居>, 지본담채, 25.3×37.5cm, 국립중앙박물관


도 23. 李昉運,《 輞川十景圖 》중 <망구장>, 지본담채, 27.3×30.5cm, 홍익대박물관


은거지로 들어와 출사의 꿈을 접는 선비의 모습은 이방운의 <輞川閑居>(도 22)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작품은 王維의 시 「輞川閑居」 중 “한번 따라 백사에 돌아오니/ 다시 청문에 이르지 않는다(一從歸白社 不復到靑門)”라는 구절이 화제이다.31)

이방운은 前景에 강가 마을의 풍경, 머리에 짐을 인 아낙네, 소로 밭을 가는 농부와 더불어 그렸고 굽은 소나무 곁에 선인물이 이러한 풍경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화제 시의 詩情을 표현했다. 경물에 대한 상세한 묘사 등은 초록으로 담채 된 화면과 더불어 농번기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왕유 詩句에 언급된 ‘白社’는 낙양성 동쪽에 있는 곳으로 晋代 董京의 은거지이며, ‘靑門’은 長安城의 東門으로32) 入官하는 것을 상징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방운은 이 구절의 표현에 귀거래하여 出仕의 뜻을 접은 도연명의 삶을 이입시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때가 아니면 세상의 부귀와 명예를 등지고 隱居하며 산수와 더불어 전원생활을 하는 儒者의 삶은 곧 조선시대 문인 사대부들의 理想像이었다. 이같은 지향은 왕유가 망천에서 삶을 영유하며 지은 시들을 화제로 한 시의도로 표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31)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한번 따라 백사에 돌아오니/다시 청문에 이르지 않는다/

때로는 처마 앞에 있는 나무에 의지하여/멀리 언덕 위의 촌을 바라본다/

청고는 물에 임해서 피고/흰 새는 산을 향해서 뒤돌아난다/

적막하다 어능자여/두레박이 바야흐로 농원에 물을 댄다.

(一從歸白社 不復到靑門
時倚檐前樹 遠看原上村

靑菰臨水發 白鳥向山飜

寂寞於陵子 桔槹方灌園)” 全唐詩 권126.
32) 왕력 저, 송용준 역, 중국시율학1(소명출판사, 2005), p.431. 각주 334, 335 참조.



Ⅲ. 화면 표현의 특징


1. 정형화된 도상의 실경 산수 표현


왕유는 자신이 은거했던 終南山 주변 輞川의 모습을 여러 편의 시와 그림으로 남겼다. 왕유가 그린 <망천도>는 현재 소실되어 전하지 않고, 北宋代 郭忠恕(약 910~977)가 이를 임모해 횡권형식으로 그린 <臨王維輞川圖>를 통해 그 형태를 추정할 뿐이다. 왕유의 망천집 중 일부 시를 화제로 한 이방운의 《 輞川十景圖 》는 비록 10곳의 경물이 각 장면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곽충서의 <臨王維輞川圖> 화면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방운의 《 輞川十景圖 》 중 <北垞>와 <南垞>는 곽충서의 작품과 서로 뒤바뀌어 건물 이름이 적혀 있는데, 이는 1617년 곽충서의 작품을 모사해 石刻한 郭世元의 <망천도권>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李昉運의 《 輞川十景圖 》는 곽세원의 석각을 탁본한 작품인 <망천도권>이나 혹은 곽세원 이후에 곽세원의 <망천도권>을 방작한 다른 작품을 모본으로 그린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삽도 1 참고)33)

더욱이 곽세원의 작품에 <망구장>의 화제시가 없다는 점은 李昉運이 王維가 읊은 「망구장」을 <망구장>의 화제로 쓰지 않고 「積雨輞川莊作」을 화제로 적고 있다는 점에서도 郭世元 本을 모본으로 삼았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34)


이와 연관해서 주목되는 것이 姜俒(1739~1775)의 三當齋稿에 실린 「輞川圖跋」 내용이다. 강흔은 이 글에서 “구영이 곽충서를 임모하여 그리고 문징명이 20수의 시를 쓴 <망천도>를 본 왕세정이 왕유의 시를 읽고 이 그림을 보니 내가 왕유인지 왕유가 나인지를 모르겠다” 는 跋語를 언급하며 “(강흔이) 명나라 화가가 곽충서를 임모하고 시를 쓴 석각본 <망천도>를 보니 그림이 섬세하고 글이 시원스러워 가히 아낄만하다”고 하였다.

강흔은 강세황의 아들로 중국 서화를 접할 기회가 적지 않았을 듯하고, 서화에 대한 식견 또한 남달랐던 듯하다. 특히 이 발문에서 명나라의 화가가 곽충서를 임모한 석각본이 있다고 언급한 내용을 통해 볼 때 곽세원 본의 조선 유입을 추정할 수 있다.


33) 곽세원의 <망천도권>은 <郭忠恕摹輞川圖卷> 또는 <郭世元摹郭忠恕筆輞川圖卷>으로 불리기도 한다.
34) 姜俒, 三當齋稿 권春 「輞川圖跋」 “往者 仇實夫臨郭忠恕 文待詔書二十絶句 王鳳洲 跋語云 讀摩詰詩覽此畵 不知我爲摩詰 摩詰爲我也 今觀石刻一本 皇明人從忠恕本移摸者 且書諸詩 畵頗纖密 書亦蕭散可愛.” 이같은 내용은 고연희, 앞의 논문, p.155. 각주 27, 28 참조.


곽충서, <임왕유망천도>  <北垞>  <南垞>


곽세원, <망천도권> <南垞>


곽세원, <망천도권> <北垞>


李昉運, 《 망천십경도 》<南垞>


李昉運, 《 망천십경도 》<北垞>

삽도 1.《 輞川圖 》 중 <北垞>과 <南垞>의 비교



이처럼 李昉運이 詩題로 제시된 망천의 경물 표현에 중국의 모본을 충실히 따르고 있음은 「積雨輞川莊作」을 화제로 하는 <망천별서도>(도 20)와 <하경산수도>(도 21)의 경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방운은 《 輞川十景圖 》 2면 <망구장>(도 23)과 동일한 도상으로 <망천별서도>(도 20)를 그렸다. 또한 <하경산수도>의 경우에도 《 輞川十景圖 》의 <南垞>와 <죽리관>을 화면의 상하에 배치하고 자연스럽게 연결하고 있다. 특히 <하경산수도>의 화면 중앙에 그려진 가옥 앞 마당에 묘사된 두루미는 《 輞川十景圖 》의 <南垞>에 묘사된 것과 동일해 李昉運이 《 輞川十景圖 》의 각 가옥과 경물 등을 숙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輞川과 관련된 王維의 시를 화제로 그리는데 차용했음을 알 수 있다.(삽도 2 참조)


삽도 2. 이방운의 <夏景山水圖>와 《輞川十景圖》중의 <南垞>, <竹里館>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방운의 《망천십경도》의 경물은 곽충서의 <망천도> 도상을 기본으로 정형화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는 망천에 대한 조선시대의 이해가 중국의 실경을 이상향으로 환치한 것과도 연관된다. 따라서 망천과 관련된 詩句 표현에 중국의 모본을 따른 것은 구체적인 실제 지명, 가옥 등의 표현에 필수적인 선택으로 풀이할 수 있다.


삽도 3. 芥子園畵傳 <人物屋宇譜>의 인물 표현과 왕유 시의도 1



2. 중국화보의 영향과 인물 표현의 변화


芥子園畵傳의 <人物屋宇譜>와 당시화보는 왕유 시의도의 인물 표현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화제에 따라 표현된 화면상의 인물, 즉 隱者의 표현에 산수 묘사보다 더욱 중점을 둔 것은 왕유 시의도를 통해 은거하는 삶에 자신을 이입하고자하는 적극적인 표현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다.


왕유 시의도의 인물표현과 芥子園畵傳의 <人物屋宇譜> 도상의 영향관계는 정선, 김홍도, 이방운의 왕유 시의도에서 예를 찾을 수 있다. 王維의 시 「終南別業」을 화제로 그린 詩意圖의 인물 표현이 1명에서 2명으로 바뀌며 화면의 변화가 이루어진 것은 대표적인 예이다.(삽도 3 참조)

“가다가 물길이 다한 곳에 이르면/ 앉아서 구름 이는 그때를 바라본다”를 화제로 그린 詩意圖 중 1명의 인물만을 화면에 그린 시의도는 南宋代 馬麟의 <坐看雲起圖>(도 24)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馬夏派 양식의 변각구도로 화제의 내용처럼 자연을 관조하며 여유자적하는 隱者의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다.35)

朝鮮의 경우 尹斗緖의 <坐看雲起時>(도 6)가 있다.


35) 박은화, 앞의 논문, p.80.

도 24. 宋 理宗 글씨(좌), 馬麟 그림(우), <坐看雲起圖>, 견본수묵,
25.1×25.0cm, 1256년, 25.1×24.9cm, 미국 The Cleveland Museum of Art


芥子園畵傳 <人物屋宇譜> 중 ‘撫孤松而盤桓’


이방운, <망천한거> (인물부분)

삽도 4. 芥子園畵傳 <人物屋宇譜>의 인물 표현과 왕유 시의도 2



두 작품은 시의 주인공이 홀로 앉아 구름이 이는 곳을 바라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는 시의 내용 중 “흥이 나면 홀로 찾아가(興來每獨往)”라는 구절을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비교해 볼 때 鄭敾의 <坐看雲起> 중 인물표현 부분은 芥子園畵傳의 <人物屋宇譜>중 “行到水窮處坐看雲起時”를 표현한 모티브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화보에는 산에 올라 구름이 이는 곳을 함께 보며 앉은 2명의 인물로 그려져 있다. 鄭敾은 담소하는 두 인물로 金弘道 역시 마주 앉은 두 인물이 산속의 높은 곳의 물길이 시작되는 곳에 가서 閑談을 나누는 모습으로 표현해 화보의 영향을 알 수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방운의 <망천한거>는 왕유의 시 「망천한거」를 화제로 한 시의도이다.
이중 화면 오른쪽의 인물 표현은 芥子園畵傳 <인물옥우보>에 실린 도연명의 <귀거래사>중의 한 구절을 그린 도상과 동일함을 알수 있다.(삽도 4 참조)

이 도상은 이방운이 화제로 한 왕유 詩句의 詩情을 벼슬을 버리고 귀거래한 陶淵明의 삶과 동일시하며 표현한 것이다. 즉 화면 우측에 표현한 굽은 소나무 곁의 인물은 마치 陶淵明의 「귀거래사」 중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인다(撫孤松而盤桓)”라는 구절을 묘사한 다른 작품들과 유사하다.
이방운은 <망천한거>에서 벼슬을 접고 귀거래하여 出仕의 뜻을 접은 도연명의 삶이 “다시 청문에 이르지 않는다”라는 화제 시구와 맥이 닿아 있음을 화보의 도상 차용으로 나타내었다.


도 25. 項聖謨,《왕유 시의도책》중 <죽리관>,1629, 지본수묵, 28.0×29.7cm,북경고궁박물원


한편 당시화보의 도상을 차용하여 왕유 시의도의 詩意를 더한 경우는 김홍도의 <죽리탄금도>, <수하오수도>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김홍도의 <죽리탄금도>는 거문고를 타고 긴 휘파람을 불며 여흥을 즐기는 은거 문인상을 표현한 것으로 동일한 시구를 화제로 한 당시화보의 <죽리관>화면을 차용했다. 화보와의 차이는 신분에 대한 상징으로 茶童을 삽입한 것이다.


이같은 표현은 項聖謨(1597~1658)의 <죽리관>(도 25)이나 이방운의 《輞川十景圖》 10폭 중<죽리관>의 경우와 차별되어 주목된다. 항성모의 <죽리관>은 대나무 숲에 앉아 탄금하는 인물은 묘사하지 않고 적막하고 평온한 시의 분위기를 시각적으로 표출하고 있다.36)

반면 이방운의 <죽리관>은 산수자연에 위치한 건물 죽리관의 표현에 더욱 초점을 두었다. 이방운이 대나무로 둘러싸인 집 안에서 彈琴을 하는 인물을 묘사한 것과 비교할 때 김홍도의 <죽리탄금도>는 망천이란 산수 속의 實景보다는 詩句의 抒情을 극대화하기 위해 대나무 숲에서 탄금하는 인물에 초점을 두었고, 이를 위해 당시화보의 화면을 차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삽도 5 참조)


삽도 5. <죽리관>의 표현


당시화보 중 <죽리관>


이방운,《망천십경도》 중 <죽리관>


김홍도의 <樹下午睡圖>와 관련해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唐詩畵譜에 실린 <春眠>이다.37)
화보에는 「전원락」의 여섯 번째 詩의 全文을 적고 비질을 하고 있는 侍童과 날고 있는 앵무새를 화면에 그려 詩句의 詩意를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唐詩畵譜의 삽도와 김홍도의 <수하오수도>를 비교해 볼 때 표현된 경물과 인물의 자세 등에서 유사함이 보여 金弘道가 화보를 차용했음을 알 수 있다. 김홍도는 화면에 적은 「전원락」의 일부 詩句만을 표현하려는 듯 화보와는 달리 비질을 하고 있는 시동, 앵무새의 표현 등은 생략하고 있다. (삽도 6 참조)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정선, 김홍도는 세속의 욕망을 접고 은거하는 隱者의 표현으로 개자원화전과 당시화보의 인물 도상을 차용하며 화제가 된 詩句의 詩情을 보다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36) 박은화, 앞의 논문, pp.89~90.
37) 王維의 「田園樂」 7수는 唐詩畵譜 6言 화보 부분에 「幽居」, 「田園樂」, 「三台」, 「村居」,「散懷」, 「春眠」이란 제목으로 모두 6수가 실려 있다. 화보에 실려 있는 순서는 시의 원순서를 따르지 않았다.
또한 唐詩畵譜에 「田園樂」, 「三台」, 「村居」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 시의 작자는 王維가 아닌 王建(약 767~약 830)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


唐詩畵譜의 <春眠>


김홍도, <樹下午睡圖>

삽도 6. 唐詩畵譜의 <春眠>과 김홍도의 <樹下午睡圖>



Ⅳ. 맺음말


왕유의 시는 杜甫의 시와 더불어 조선시대 시의도의 화제로 애용되었다. 특히 「도원행」,輞川集에 실린 시를 화제로 한 시의도는 가상의 이상향인 ‘桃源’과 중국의 실경에서 이상향으로 기탁된 ‘輞川’의 표현을 통해 조선 문인들의 이상향에 대한 동경을 보여주었다. 또한 망천에서의 삶을 읊은 「終南別業」, 「積雨輞川莊作」, 「輞川閑居」, 「田園樂」을 화제로 한 왕유시의도는 나설 때가 아니면 세상의 부귀와 명예를 등지고 隱居하며 산수와 더불어 전원생활을 하는 隱者의 모습이 곧 조선시대 문인 사대부들이 동경하는 이상적 인물상의 회화적 표현
임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특징은 자연과 사계절의 정취를 주로 표현한 두보 시의도와 차별성을 보여 주목된다.


왕유 시의도에 표현된 도원과 망천으로 대별되는 이상향의 화면적 재현은 중국의 작품이 모본이 되어 경물의 정형화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未知의 공간, 假想의 공간인 이상향표현을 중국의 실경에 기탁하여 보다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욕망 표현으로 성취하려 했다고 풀이할 수 있다. 또한 개자원화전, 당시화보 같은 중국화보의 인물 도상을 차용하며 산수의 표현보다 詩의 話者인 인물을 화면에 비중있게 표현하였다. 이것은 회화 창작자이며 문화 향유자인 문인들의 이상적 인물상에 대한 적극적인 자기이입이 이루어진 것으로 풀이 할 수 있다.


시의도 화풍의 경우 윤두서, 정선의 왕유 시의도에서는 조선 중기의 절파 화풍과 조선후기에 정착된 남종화풍이 혼재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반면 강세황, 김홍도 등의 시의도에서는 화보류의 영향을 받아 간일한 필체와 구도 등에서 남종화풍의 정착을 인지할 수 있다.
각 화가별 특징을 살펴보면 윤두서의 경우 문인화가로서의 詩情 표현이 주목되나 정선의 시의도에 이르면 이미 경물 표현의 정형화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즉 이 시기에는 이미 왕유 시의도의 제작자와 감상자 간에 공유된 도상적 인식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김홍도의 경우 간일한 필체와 여백의 활용을 통해 詩意를 강조한 반면 이방운은 담채를 적절히 사용하고 화제시에 언급된 경물을 화면 가득 표현하며 詩意를 재현하고 있는 특징을 보인다. 이방운과 같은 표현방식은 화원인 이인문과 이명기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왕유 시의도의 화면은 윤두서의 <좌간운기시>와 같이 시와 그림이 분리된 화첩의 형태에서 점차 화면 안에 시를 적는 형식으로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김홍도 작품의 경우 화제로 적은 시구가 화면 속에 묘사된 경물과 더불어 화면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詩情을 극대화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왕유의 「도원행」을 화제로 한 시의도의 경우 도연명의 「도화원기」와 동일한 화면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시의 내용에 따라 여러 폭의 화면으로 나누어 그리기도 했다.


이상에서 살펴 본 결과 조선시대의 王維 詩意圖는 화면을 통해 표현하고자했던 朝鮮 文人들의 理想鄕에 대한 동경과 隱居에 대한 지향의 한 표현임을 알 수 있다.



투고일 : 2015년 5월 11일 ㅣ 심사개시일 : 2015년 5월 16일 ㅣ 심사완료일 : 2015년 5월 30일



국문초록


唐代시인 왕유(699~759)의 시는 조선시대 시의도의 화제로 애용되어 현재 30여점의 작품이 전하고 있다. 그가 隱逸했던 輞川에서 쓰여진 輞川集의 10편, 「終南別業」, 「田園樂」 등의 시는 조선 초부터 그려져 감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조선후기에 이르면 화가 윤두서(1668~1715), 정선(1676~1759), 강세황(1713~1791), 심사정(1707~1769), 김홍도(1745~?), 이방운(1761~?) 등의 작품에 화제가 되었다.

왕유 시의도는 산수 자연과 사계절의 정취를 표현한 杜甫(712~770) 시의도와는 달리 문인들의 理想鄕과 理想像, 즉 중국 絶景에 대한 동경이 이상향으로 전환되어 추구된다는 점과 儒者의 이상상인 은일자의 삶과 서정을 표현한 것이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왕유의 시 「도원행」과 망천집 등은 ‘도원’이라는 관념적인 장소는 물론 ‘망천’이라는 중국 실경에 이상향을 기탁해 지향한 조선 문인들의 문화적 수용과 조선 정착의 예를 보여준다.
따라서 《천고기관첩》의 <도원도>, 정선의 <초객초전>, 이방운의 <망천십경도> 등 시의도는 중국 작품을 바탕으로 정형화된 산수 표현으로 이상향의 모습을 보여준다.


조선 문인들에게 은거지로 인식된 망천에서의 삶은 왕유의 시 「終南別業」, 「田園樂」, 「망천한거」 등의 구절을 그린 시의도를 통해 이상적인 은일자의 삶이 묘사되었다. 윤두서의 <좌간운기시>, 정선의 <좌간운기>, 김홍도의 <고사관수도>, <산거한담> 등은 왕유의 시구를 화제로 하여 유학자가 지향하는 은거의 일상을 그린 시의도이다. 따라서 화면에서 인물의 표현에 중점이 주어지고 이 과정에서 개자원화전과 같은 중국화보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조선시대 문인들은 王維 詩意圖를 통해 지향했던 理想鄕과 隱逸 추구의 理想像을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 주제어
왕유 시의도(王維 詩意圖), 이상향(理想鄕), 망천(輞川), 은거(隱居)



Abstract

Wang Wei’s Poetry-based Paintings and the Utopian idea of Joseon Literati


Cho In-Hee (Seoul National University)


Poems of Wang Wei(699-759) of Tang Dynasty was used regularly as objects of poetry- based paintings in the Joseon period, 30 works of which remains until now. Especially, leading painters such as Yoon Du-seo(1668-1715), Chung Sun(1676-1759), Kang Se-whang(1713-1791), Shim Sa-jung(1707-1769), Kim Hong-do(1745-?), Lee Bang-un(1761-?) made their works using Wang’s poems as painting’s objects.

It is interesting in that Wang’s poetry-based paintings mainly express utopian ideas of Joseon literati and the life and lyricism of hermits, contrary to poetry-based paintings of Tu Fu(712-770) which focus on the emotional feeling of nature and seasons. As Joseon literati passionately desire to see the superb scenery in China, the scenery had gradually become their ideal place, or utopia.

of 《Album of Wonderful Ancient Stories》, Chung Sun’s , and Lee Bang-un’s 《Ten Views of the Wangchuan Villa》 are the paintings that show us how Joseon literati culturally accepted chinese real or ideal scenery as their utopia and that reveal standardized expression of ideal nature based on chinese scenery and poems.

Yoon Du-seo’s represent the daily life which literati looked for using as painting’s objects Wang’s poem 「My Cottage at Deep South Mountain」, 「Joy in the countryside」, 「Living Lazily by the Wang River」, 「Written at Wang River Estate in the Rain」 etc. It would be the case that there were some influence on the paintings by Chinese pictorial books like Mustard Seed Garden Manual of Painting.

We can find out that Joseon literati pursued their utopia and hermit-like life through Wang’s poety-based paintings and it will be useful to understand their life and the nature of their aesthetic spirit.


▶ Key words

Wang Wei’s Poetry-based Paintings, Utopia, Wangchuan, Hermit-like life




참고문헌


1. 史料


舊唐書
宣和畫譜
郭熙 郭思, 林泉高致
李 穡, 牧隱詩藁
李明漢, 白洲集
柳希春, 眉巖集
張彥遠, 歷代名畫記


2. 단행본 및 도록


국립중앙박물관, 산수화, 이상향을 꿈꾸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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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論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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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경산수 이방운 [夏景山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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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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