江石
洪裕孫
濯足淸江臥白沙 心神潛寂入無何 [탁족청강와백사 심신잠적입무하]
맑은 강물에 발을 씻고 모래 위에 누우니, 마음은 고요하여 청정무구 경지로세
天敎風浪長喧耳 不聞人間萬事多 [천교풍랑장훤이 불문인간만사다)
귓가에는 오직 바람에 물결 소리, 번잡한 속세 일은 들리지 않는다네
홍유손 (여경(餘慶), 소총(篠䕺), 광진자(狂眞子))
1431(세종 13)∼1529(중종 24). 조선 전기의 학자. | 개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여경(餘慶), 호는 소총(篠䕺)·광진자(狂眞子).
[생애 및 활동사항]
가세가 청빈하였으나 경(經)·사(史)를 섭렵하고, 방달(放達)한 기질에 얽매임이 없었다.
과거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향리의 역(役)을 벗고자 꾀하지도 않았는데, 1481년(성종 12) 남양군수 채수(蔡壽)가 문장이 능한 것을 보고 역을 면하게 해주었다. 그러자 곧 영남으로 가서 김종직(金宗直)을 찾아가 문인이 되었다.
이 때 김종직은 “이 사람은 이미 안자(顔子)가 즐긴 바를 알고 있으니 학자들은 모두 본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이어 바로 두류산(頭流山)으로 들어가 수업한 뒤, 서울로 돌아와서 김종직이 시사(時事)를 아뢰지 않는 것을 보고 비판하였다. 그는 세상을 희롱하여 고답(高踏)하면서 영리(榮利)를 구하지 않고 일생을 보냈다.
당시의 명류 김수온(金守溫)·김시습(金時習)·남효온(南孝溫) 등과 특히 가깝게 지내면서 죽림7현을 자처하고 노자(老子)·장자(莊子)의 학문을 토론하며 시율(詩律)을 나누었는데, 남효온은 그를 평하여 “문(文)은 칠원(漆園) 같고, 시는 산곡을 누빈다(涉).”고 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제주도에 유배되고 노비가 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왔다. 76세에 처음으로 처를 맞아들여 아들 하나를 얻어 지성(至誠)이라 이름하였다. 저서로는 『소총유고(篠䕺遺稿)』가 있다.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소총유고(篠䕺遺稿)』
- 『점필재집(佔畢齋集)』
- 『허암유집(虛庵遺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해동잡록(海東雜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사우명항록(師友名行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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