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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먼 데, 그 먼 데를 향하여」

Bawoo 2016. 1. 23. 20:01

 

신경림

 

「먼 데, 그 먼 데를 향하여」

 

아주 먼 데.
말도 통하지 않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먼 데까지 가자고.

어느날 나는 집을 나왔다.
걷고 타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몇날 몇밤을 지나서.

이쯤은 꽃도 나무도 낯이 설겠지,
새소리도 짐승 울음소리도 귀에 설겠지,
짐을 풀고

찾아들어간 집이 너무 낯익어,
마주치는 사람들이 너무 익숙해.

사람 사는 곳
어디인들 크게 다르랴,
아내 닮은 사람과 사랑을 하고
자식 닮은 사람들과 아웅다웅 싸우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보니,
매화꽃 피고 지기 어언 십년이다.
어쩌면 나는 내가 기껏 떠났던 집으로
되돌아온 것은 아닐까.
아니 당초 집을 떠난 일이 없는지도 모르지
그래서 다시,

아주 먼 데.
말도 통하지 않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먼 데까지 가자고.

나는 집을 나온다.
걷고 타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몇날 몇밤을 지나서.


시_ 신경림 - 1935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1956년《문학예술》에 시가 추천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농무』, 『새재』, 『달 넘세』, 『가난한 사랑노래』, 『길』, 『쓰러진 자의 꿈』, 『뿔』, 『낙타』, 『사진관집 이층』 등이 있다. 만해문학상, 이산문학상, 단재문학상, 대산문학상, 공초문학상, 시카다상 등을 수상함.


낭송_ 남도형 - 성우. KBS '슬럼독 밀리어네어' 등에 출연.


배달하며

'먼 데'가 그립지 않다면, 그래서 지금 여기가 마냥 좋다는 사람 있다면 나는 그를 믿을 수 없을 듯싶다. 새로움에 대한 갈증 때문에, 미지에의 궁금증 때문에 세상엔 시가 있고 희망이라는 것도 있고 또 이별의 아픔도 있는 것이니 한없는 떠남의 운명을 타고난 시인. 낯선 곳, 아주 낯선 곳이 좋아 비로소 짐을 푸는 시인의 운명을, 아니 사명을 이 시에서 본다.
노경(老境)에서의 떠남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정신인가. 올려다본 밤하늘의 별자리에서 느리게, 자재하게 걸어가는 시인의 모습을 본다.

문학집배원 장석남


출전_ 『사진관집 이층』(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