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가가 없는 아이가 있다. 세 아이 중 중간 계집 아이. 별로 사이가 안 좋은 부모와 엄마와 사이가 안 좋은 할머니까지 같이 살고 있다. 어느 날 엄마는 외할머니 집에 가 있으라고 한다. 외가가 없는 줄 알았는데 사촌외가라고. 소녀는 동생들과 함께 외가에 간다. 강변 근처에 있는. 할머니는 혼자 살고 있으면서 반색을 하며 세 아이를 맞이하여 보살핀다. 그러던 어느 날 군에 가 있던 외삼촌이 휴가차 나오고 덕분에 강에 가서 물논링도 한다. 그리 지내던 중 아버지가 왔다가 가고 ... 얼마 있다가 집에 돌아오니 동생이 태어나 있다. 엄마가 난 아이가 아닌 아버지 차에 타고 있던 여인-아마 외할머니라고 부른 노인의 딸이지 싶다-의 아이인 듯 싶은... [소감] 작가의 뛰어난 문장력에 감탄하며 들었다.
[외할머니집이라고 알았던 강변마을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중심으로, '어린 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된다. 동생들과 함께 외할머니집에 가게 된 '나'와 형제들. 그곳에서 외삼촌도 만나고 이것저것 추억을 만든다. 그곳에서 할머니의 딸, 즉 이모로 추정되는 여자의 사진을 발견하게 되는데 나중에 데리러 온 아버지의 옆에 이모가 타고 있는 걸 보고 이상하게 생각한다. 집으로 돌아온 뒤 외할머니댁을 입에 올릴때마다 엄마는 등짝 스매시를 날리고 자연스럽게 강변마을에서의 추억은 비밀이 되어간다. 여기서 이모인 줄 알았던 여자가 알고보니 아버지의 새로운 부인이었고 '나'와 형제들이 간 곳이 외할머니댁이 아니라 아버지와 재혼한 여자의 집이라는 사실이 반전이라면 반전이고 포인트라면 포인트랄까
[출처] 전경린 작가의 '강변마을' - 머리에 쥐가 나고 새로운 작품이 떠올랐다|작성자 the9에서 발췌
[작품 전문 - 출처: cafe.daum.net/youwool/EfSr/1 여울 독서회]
국숫집 뒷마당의 넓은 건조장 가득, 가지런히 빗긴 듯한 국숫발들이 간지럼을 타듯 흔들리고 있었다. 국숫발은 빗줄기를 닮기도 했고, 늘어뜨린 무명실을 닮기도 했다. 무수히 많은 국숫발과 무수히 많은 빗줄기와 무수히 많은 무명실이 섞여서, 바람과 햇빛의 빗질에 소리 없이 웃는 것 같았다. 공기 속에는 포근한 밀가루 냄새가 떠다니고 내 속눈썹은 무거워져 저절로 눈꺼풀이 감겼다.
엄마는 바로 전날 말려서 잘라 얇은 종이로 묶은 새 국수를 사 오라고 시켰다. 전날 나온 국수는 국숫집 나무상자의 그늘 속에 얌전하게 쟁여져 있었다. 여름방학을 한 뒤로 우리는 일주일 내내 국수를 먹고 있었다. 비가 내린 날은 멸치를 우려 양파를 넣고 계란을 푼 국물에 부추와 호박나물을 잔뜩 올린 따뜻한 물국수를, 마른 날엔 잘게 썬 김치와 참기름을 섞어 올린 고추장 비빔국수를 먹었다.
우리 집은 중학교 앞에서 문방구를 했다. 학용품과 책, 과자류를 파는 가게였다. 방학 동안은 학교 운동장이 텅 비고 우리 가게도 문을 닫아 집 바깥은 조용했지만 대신 아무 데도 갈 곳이 없는 식구들로 집 안은 밤낮없이 아우성이었다. 말 대신 주먹질이나 발길질을 해대는 오빠와 설탕물을 젓가락에 찍어 먹거나 비눗방울을 날릴 때를 빼고는 잠시도 조용할 틈 없이 엉겨 붙어 울거나 웃는 세 명의 동생과 형제들을 피해 구석진 데를 숨어 다니는 나, 그리고 잔뜩 날이 서서 서로에게 퍼부을 욕을 우리에게 대신 쏟아내는 사이 나쁜 할머니와 엄마가 높은 담장 안에서 하루 종일 복작댔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언제 들어왔다가 나가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겨우 열한 살이었지만 나는 벌써 인생에 지친 기분이었다.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길 위에 떠오르는 커다란 뭉게구름 속의 침묵을 들이마시며 나는 아무도 없는 고요한 곳을 그리워했다. 다른 아이들처럼 먼 곳에 있는 외갓집이라도 가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 집에는 없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외갓집이었다. 어느 집보다 빨리 컬러텔레비전이 들어왔고 전축과 연필깎이와 선글라스와 멋진 오토바이가 있었지만 외갓집은 없었다. 아버지는 작은 건축회사의 총무 부장이었지만 친척들은 뒤에서 수완가라고 수군거렸다. 아버지라면, 해결 못하는 일이 없다고 했다.
그날 긴 국숫발을 앞니로 똑똑 분질러 먹으며 터덜터덜 걸어 집으로 갔을 때, 나에게 갑자기 외갓집이 생겼다. 오빠와 나와 여동생이 외갓집에 가게 된 것이었다. 어떤 외갓집이냐고 물으니 엄마는 뜸을 들이더니 사촌 외갓집이라고 했다. 엄마는 화와 슬픔을 동시에 억누르며 의지가 깃든 초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즈음 엄마는 나를 쳐다볼 때 자주 그런 표정을 지었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 굉장한 뜨거움이 훅 끼쳐 왔다. 당황하는 사이 버스는 먼지를 일으키며 떠나버리고 길은 텅 비었다.
여기서부터 5리를 걸어야 해.
우리를 데려간 아저씨가 들판 길로 접어들며 말했다. 발을 디딘 길 위에 타닥타닥 불꽃이 타듯 모래와 사금파리들이 반짝거렸다. 하늘과 해와 길이 모두 백광 속에서 타오르는 것 같았다. 나무 한 그루 없는 길이 벼가 자라는 들판 가운데로 죽 뻗어 있었다. 아저씨가 걷기 시작했기 때문에 오빠와 나와 동생도 따라 걸었다.
얼마 못 가 머리 위쪽 정수리가 잉걸불을 인 듯 뜨거워졌다. 햇볕이 짧은 칼날처럼 어깨에 파고들어 살을 가르는 듯했다. 5리에 대한 거리 인식도 사라지고 시간감각도 사라졌다. 신기루처럼 흰 불꽃이 일렁이는 백광 속을 부유하듯 걷고 또 걸어갔다. 마녀가 불을 때는 솥 안에 갇힌 기분이었다.
그 집은 마을의 첫 골목 안, 세 번째 집이었다. 대문으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다리를 꼬며 화장실부터 찾았다. 오빠는 물을 마시기 위해 부엌을 찾아 뛰어들었고 동생은 마당 가운데 선 채 무서운 일이라도 겪은 듯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어디선가 매미가 엄청나게 큰 소리로 울고 있었다. 나 역시 울고 싶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대문 곁에 나무처럼 크게 자란 까마중이 까만 열매를 매달고 있었는데 그 뒤에 거적을 쳐놓은 곳이 변소였다. 입구에서부터 푹 삭은 배설물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진동했다. 까마중을 지나 막아둔 거적을 들어 올리니 공기가 서늘하고 얼기설기 댄 판자 아래로 더 넓은 배설물의 바다가 파도라도 철썩 일으킬 기세로 펼쳐져 있었다. 엮어 올린 판자도 뗏목처럼 더 넓었다. 그 판자 가운데에 나 있는 직사각형의 머나먼 구멍 역시 만만치 않게 커서 양쪽 다리를 벌리고 앉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냄새 때문에 금세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돌아나가려고 할 때 누군가가 들어왔다.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햇볕에 익어 붉고 뜨거운 나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식혀준 뒤 내 손을 꼭 잡고 판자 위로 한 걸음씩 데리고 가 구멍 사이에 다리를 놓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속옷을 내려준 뒤 두 손을 잡고 나와 마주 앉았다. 그리고 눈을 맞추고 온화하게 웃는 것이었다. 그 웃음을 보자 구토처럼 신음이 올라왔다. 헉……. 나는 흐느끼듯 긴 숨을 쉬었다.
그때까지 덜컥거리며 시달리던 나의 마음이 조용히 뱃속으로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할머니는 일이 끝난 뒤에 준비해 온 휴지로 나의 뒤를 깨끗하게 닦아주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외할머니였다. 나의 사촌 외할머니는 몸집이 크고 퉁퉁했다.
은애, 이게 우리 공주님 이름이가?
변소 앞에서 외할머니는 내 이름을 수줍게 부른 뒤 확인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와 그렇게 길게 눈을 맞추어준 사람은 단연코 처음이었다. 선생님도, 엄마도 아버지도 할머니도 동생도, 어느 누구도 없었다. 뒤를 닦아준 사람도 기억하는 한 처음이었다. 그 뒤로 외할머니는 내가 화장실 갈 때마다 함께 가서 처음과 똑같이 해 주었다.
외할머니가 처음 내준 음식은 붉은색 즙이었다. 수박화채를 해놓고 기다리다 얼음도 녹고 수박도 녹아 즙이 된 것이었다. 수박즙을 두 잔씩 마시고 나니 눈 속의 열기가 식는 것 같았다. 외할머니는 피부가 햇감자색이었고 얼굴 모양도 감자처럼 둥글고 감자 속처럼 환했다. 주름진 얼굴이지만 눈과 코와 입술은 늙지 않고 예뻤다. 집에는 외할머니 혼자뿐이었다. 우리는 찬 우물물로 등목을 하고 늦은 점심을 먹었다. 햇감자를 깐 고등어조림과 처음 먹어보는 중국 춘장과 연한 고구마 줄기에 멸치 몇 마리를 넣고 좀 맵게 볶은 나물, 깜짝 놀랄 만큼 맛있는 음식들이 꼭 안아주듯이 혀에 감긴 뒤 목을 타고 내려갔다.
점심을 먹은 뒤에는 외할머니가 마루 위에 홑이불을 펴주었다. 나와 오빠와 동생은 그 위에 나란히 누워 선풍기 바람을 쐬며 낮잠을 잤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지만 깨어났을 때는 가지런히 빗질 되어 햇살에 잘 마른 국수처럼 몸이 고요하고 보송보송했다. 몸 안에서 찔러대던 가시들이 모두 뽑혀 나간 것 같았다.
동생들과의 부대낌과 엄마의 악다구니와 계집애인 것 자체를 질타하는 할머니의 힐난과 언제 터질지 알 수 없는 아버지의 돌발적인 분노, 가게 문을 두드리고 들어서는 모르는 사람들의 눈빛에서 느꼈던 불안, 차가 지나갈 때마다 구름처럼 일어나 집 안 구석구석에 스며들던 입자 굵은 흙먼지 같은 것이 전부 가시가 되어 몸을 찔렀던 모양이었다.
저녁이 될 때까지 외할머니는 부엌 곁 텃밭에서 풀을 뽑고, 우리는 밭 가장자리의 사철나무에 매달려 놀았다. 허리가 굽은 늙은 사철나무들은 매달리기 좋게 옆으로 구불구불 가지들을 뻗었고 총총한 잎사귀 속에는 붉은 열매들이 조롱조롱 달려 있었다. 동화에 나오는 나무처럼, 그 나무에 오르기만 하면 아무리 오래 매달려 놀아도 힘들지 않았다. 그 곁에는 장대를 얼기설기 엮어 넝쿨을 올린 오이밭이었는데 끝에 노란빛이 도는 거대한 오이들이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텃밭이 넓어서 고구마와 감자와 호박과 고추, 가지 같은 야채들이 곳곳에 자라고 있었다. 집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무성한 가시나무 울타리였다. 자세히 보면 푸른 탱자 열매가 빼곡하게 매달려 있었는데 어떤 가시도 열매를 찌르지는 않았다.
울타리의 가시를 빼고는 그 집의 모든 것이 둥글둥글했다. 밭도 둥글고 야채 잎사귀들과 오이도 둥글고 지붕도 마당도, 마루와 방도, 외할머니의 눈과 뺨과 손과 배와 목소리와 미소도, 모든 것이 둥글고 얌전했다.
긴 저녁이 지나는 사이 가시나무 울타리 틈 사이로 어둠이 몰래몰래 숨어들어와 마당에 웅크렸고 밤하늘은 공연장 무대처럼 깊숙이 열렸다. 그리고 어둠을 먹은 별들이 하나둘 딸랑딸랑 소리를 내며 등장했다. 별들은 서로 모여 꽃다발처럼 뭉쳐서 웃기도 했고 띄엄띄엄 떨어져 망망대해를 지나는 조각배처럼 까딱까딱 외롭고 불안한 신호를 보내기도 했다. 할머니는 마당의 평상 아래에 모깃불을 피우고 수박을 내왔다. 달고 싱싱한 수박즙을 삼키니 한낮에 걸어온 불꽃 튀던 모랫길이 떠오르고 까닭 없이 서러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엇에 쫓기듯 씨도 뱉지 않고 수박을 허겁지겁 먹었다.
수박을 참 잘 먹는구나. 조금만 더 빨리 오지. 엊그제까지만 해도 밭고랑에 수박이 지천으로 뒹굴었는데. 지금은 수박 수확이 끝났어. 그래도 이제 포도 수확철이란다. 대신 포도는 실컷 따 먹을 수 있어.
수박이 밭에 굴러다니고 포도를 밭에서 실컷 따 먹을 수 있는 곳이라니,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평상에 누워 별들을 보니 빛나는 별들이 넝쿨을 따라 주렁주렁 엉겨 붙은 포도송이로 보였다. 그날 밤 오빠와 나는 알고 있는 모든 노래를 다 불렀다. 내 몸은 뚜껑이 활짝 열린 노래상자 같았다.
잠이 깼을 때 낮은 채살문으로 가루우유 같은 아침빛이 배어들고 있었다. 오빠와 동생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나는 일어나 앉아 있다가 무엇에 끌려가듯이 거울 앞으로 가서 섰다. 그리고 거울 테에 빼곡히 붙은 조가비를 만져보았다. 우수수 떨어질 것 같았지만 모두 접착제로 단단히 붙여 있었다. 거울 옆에 흰색 똑따기 백과 갈색 천으로 만든 지퍼 가방이 걸려 있었다. 거울 아래 작은 상 위에는 손길이 많이 닿아 반들반들한 새 모양의 검은 돌이 놓여 있고 그 곁의 액자 속에는 예쁜 처녀가 정면을 향해 고개를 약간 튼 채 살며시 웃고 있었다. 일부러 사진관에 가서 얼굴만 크게 찍은 사진이었다. 옆 가르마를 탄 처녀는 긴 앞머리가 흘러내리지 않게 관자놀이께에 핀을 찔렀는데 자세히 보니 달팽이 모양이었다. 머리 위에 촉수까지 솟아 있었다. 흑백사진이어서 그 예쁜 핀이 어떤 색깔인지 알 수 없었다. 동그란 얼굴이 외할머니를 닮았지만 따스하고 포근한 감자 맛이 아니라 시원하고 달콤한 배 맛이 날 것 같은 처녀였다.
앉은뱅이책상과 소설책과 잡지책과 사전과 참고서 들이 꽂혀 있는 책꽂이도 있었다. 책상서랍이 두 개였다. 나는 서랍을 열어볼까 하다가 지그시 참고 돌아앉았다.
채살문 문고리를 풀고 밀어보니 대문 쪽 마당으로 난 높은 툇마루가 나왔다. 툇마루 아래에 희고 신선한 아침이 가득히 몰려와 있었다. 아침이 왕을 알현하는 사신처럼 그렇게도 낮게 이마를 낮추고 온다는 것을 나는 처음으로 알았다. 대문 곁 가시나무 울타리 앞으로 좁은 화단이 있는데 주황색 나리꽃들이 비좁게 피어 있었다. 나리꽃들을 보고 있으니 꽃들 속에 검정색 점이 너무 많아 어지러웠다. 고요하고 흰 아침 빛 속에서 꽃들이 등 뒤에 속임수를 펼쳐놓고 뭔가를 야유하듯 숨넘어가게 깔깔대고 웃는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채살문을 닫고 쇠고리를 걸었다.
아침을 먹은 후 외할머니를 뒤따라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골목들은 깊고 집들도 많았다. 한 사람이 지은 것처럼 비슷비슷한 집들이었다. 집집마다 탱자나무 울타리였고 길가에 키 큰 까마중이 자라고 변소가 대문 앞에 있었고 텃밭이 있었고 구릿빛 얼굴의 사람들도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비슷했다. 어떤 집에서는 찐 햇감자를 내놓았고 어떤 집에서는 떡과 사탕을, 어떤 집은 사이다를 내놓았다. 어떤 집에서는 첫 수확한 포도를 내놓았는데, 우리에게 각자 한 송이씩을 주었다. 포도송이마다 크고 탱탱한 포도알들이 서로 밀듯이 비좁게 붙어 있어 떼어내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검은 보랏빛 포도껍질을 벗기면 탱탱하고 투명한 녹둣빛 속이 나왔다. 오빠는 즙이 흥건한 포도껍질을 그냥 버렸고 나는 껍질까지 씹다시피 먹었다. 달콤한 즙이 가득한 흑보랏빛 포도도 맛있지만, 끝에 붙은 아주 작은 풋포도도 통째 아삭 씹으면 그 시고 단맛에 정신이 아찔했다. 동생은 입안의 씨를 골라 뱉느라 얼마 먹지도 못하고 끙끙댔다.
외할머니는 마을 한가운데 마당에서 놀고 있떤 아이들에게 우리의 이름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모두 친척 사이니 같이 놀고 잘 돌봐주라고 당부했다. 여자애들은 보이지 않았고 남자애들뿐이었다. 까까머리에 몸이 가느다랗고 피부가 까맣게 그을린 아이들은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숙인 채 옆눈으로 나를 보았다. 흰자위가 도화지처럼 희었다.
집에 돌아온 외할머니는 무척 힘든 일을 한 사람처럼 갑자기 지치고 늙어 보였다. 이 집 저 집에서 너무 많은 것을 먹어 배가 팽팽한 우리에게 또 미숫가루를 타주고는, 마루에 눕더니, 기운 없이 몇 번 부채를 부치다 말았다. 얼음이 든 미숫가루는 차갑고 몹시 달았다. 외할머니는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화가 난 듯 위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외할머니의 눈길을 따라가니 방문 위에 걸린 커다란 액자 속에 든 사진들이 보였다. 아기 돌 사진도 있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나란히 앉아 찍은 사진도 있고 군인의 사진도 있고 아주머니들이 어깨를 잇대 붙이고 활짝 웃으며 찍은 사진도 있었다. 액자 한가운데에 작은 방 안의 액자 속에 있던 처녀와 외할머니가 꽃다발을 들고 웃고 있었다. 처녀는 머리를 양갈래로 묶었고 교복을 입고 있었다. 눈이 둥글고 눈동자가 그 마을의 흑보랏빛 포도알처럼 컸다. 귀도 동그랗고 입술까지도 동그란 모양이었다.
언니는 안 와요?
내가 묻자 외할머닌가 돌아보았다.
은애가 언니를 아나?
아니요, 몰라요. 방 안에 있는 사진에서 봤어요.
……그랬구나. 이모란다. 언니가 아니고, 이모. 이모는, 먼 데 가 있단다.
먼 데 어디요?
그냥 먼 데.
우리도 먼 데 왔는데…….
내가 중얼거리자 외할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외할머니의 부채를 빼앗아 세게 부쳐주었다. 동생과 오빠도 부채를 빼앗으려고 했다. 나는 부채를 들고 도망쳤지만 이내 잡혔다. 하는 수 없이 차례로 외할머니를 부쳐주기로 했다. 외할머니가 하하 웃었다. 외할머니는 웃음을 그치자 갑자기 힘이 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우리 새끼들 점심 먹어야지……. 뭘 만들어줄까……. 혹시 먹고 싶은 거라도 있나?
라면요.
우리는 절실한 표정으로 일제히 소리쳤다. 국수가 아닌 라면이 정말 먹고 싶었다. 국숫발이나 밥알이라고는 섞이지 않고 김치조각도 들어가지 않고 꼬슬꼬슬한 면과 스프만 든 진짜 라면…….
그래, 내 귀한 손님들. 조금만 기다리고 있거라.
할머니는 웃으면서 마을 공판장에 라면을 구하러 갔다. 그날 우리는 송송 썬 실파를 넣고 계란까지 살짝 푼 진짜 라면을 먹었다. 정말 귀한 손님이 된 기분이었다.
점심을 먹은 뒤 할머니는 마루에 홑이불을 펴주었다. 홑이불 위에서 뒹굴고 있는데 대문 앞이 왁자지껄하더니 마을 아이들이 들어섰다. 우리는 스프링 달린 오뚜기처럼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이들은 자기 몸만큼 큰 검정색 튜브들을 허리에 끼거나 팔에 걸고 있었다.
강에 갈래?
남자아이 하나가 우리에게 물었다.
안 된다.
곁에 있던 외할머니가 냉큼 대답했다. 우리는 벌써 마루에서 내려서서 운동화를 꿰어 신고 있었다.
강에 가고 싶어요.
안 돼.
왜요?
위험해.
저 아이들은 가잖아요?
저 아이들은 강에서 자란 물고기들이지만 너희들은 안 돼.
우린 그때까지 강을 본 적 없었다.
가, 너희들끼리 가서 놀아.
할머니 서슬에 아이들은 슬금슬금 나가버렸다. 우리는 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다. 실망스러워 다리를 흔들 힘조차 없었다.
강은 어느 쪽에 있어요?
우리 집 골목을 나가 도로를 건너가서 넓은 포도밭과 넓은 수박밭과 넓은 땅콩밭을 다 지나면 둑이 나오고 그 둑을 넘어 모래밭을 지나면 거기가 강이야.
할머니가 누워서 대답했다.
강은 커요?
굉장히 크고 길고 힘이 세.
강이 그렇게 무서워요?
용처럼 무섭단다. 화가 나면 몸이 엄청나게 커져서 땅콩밭과 수박밭을 삼켜버리고 더 화가 나면 포도밭도 삼켜버리고 마을까지 삼켜버린단다. 그러니 낯선 아이들은 순식간에 꿀꺽 삼켜버리지.
나는 외할머니 곁으로 가서 누웠다. 눈을 감으니 외할머니 숨소리가 들렸다.
강이 보고 싶어요. 정말 보고 싶어요…….
나는 외할머니 품에 얼굴을 대고 조그맣게 말했다. 뜻밖에 눈물이 나왔다. 나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너 사실은 엄마가 보고 싶어서 우는 거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엄만 하나도 안 보고 싶어요. 정말로 강이 보고 싶어요.
강이 보고 싶다고 우는 애는 처음 본다.
외할머니는 내 등을 토닥였다.
곧 보게 될거야.
정말요?
그래, 곧.
곧 언제요?
외할머니는 눈을 감은 채 대답하지 않았다. 어느새 잠이 든 것 같았다. 두 눈을 감으니 외할머니 숨소리가 들렸다. 먼 강물의 숨소리 같았다.
며칠이 지난 뒤였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군인 아저씨가 들어왔다. 군인 아저씨는 어둑한 마당에 서서 외할머니에게 경례를 했다. 외할머니는 아니고 내 새끼, 하더니 숟가락을 던지고 맨발로 내려가 군인을 얼싸안았다. 모자를 벗으니 잘생긴 젊은이였다. 그는 밥을 두 그릇이나 먹은 뒤 기습적으로 물었다.
누구냐?
우리는 벙어리처럼 대답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우리의 이름을 묻는 게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처음으로 관계를 생각해 본 순간이었다. 그에게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에게 그는 또 누구인가?
외삼촌이란다.
외할머니가 오히려 우리에게 설명해주었다.
은성, 은애, 은하다.
누구냐니까?
군인이 다시 물었다.
나중에 이야기해 주마.
외할머니가 사정하듯 달랬다.
다음 날 외삼촌은 늦게까지 잤다. 점심을 먹을 때, 외할머니가 말했다.
아이들 강에 데리고 가서 좀 놀고 와.
외삼촌은 얼음이 든 오이냉국을 그릇째 들이마시고는 내려놓았다. 매미가 귀에 구멍이라도 파듯 극성스럽게 울었다. 귀를 틀어막고 싶을 지경이었다.
약속 있어요.
휴가 나온 군인에게 무슨 대수로운 약속이 있다고 그러냐? 저녁에 나가고 오늘 낮엔 아이들과 좀 놀아.
싫어요.
그럼 내일…….
외할머니의 말을 막고 외삼촌이 벌떡 일어섰다.
싫어. 싫다고!
외삼촌은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부서져라 탕 닫았다. 매미가 죽을 듯이 울어댔다. 잠시 뒤 그는 옷을 차려입고 나와 휑하니 나가버렸다. 동생이 울음을 터뜨렸다. 외할머니가 은하를 안고 달랬다.
괜찮아. 외삼촌이 군대에서 힘든 일을 겪어서 저러는 거야. 너희들 싫어서 그러는 거 아니야. 은성아, 은애야, 은하야, 걱정 말고 밥 먹어. 외삼촌 좋은 사람이니까 곧 너희들 데리고 강에 갈 거야.
매미 울음 좀, 그치게 해주세요.
나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말했다.
매미 울음소리 때문에 나도 화가 나요. 나도 외삼촌처럼 밖으로 마구 뛰쳐나가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나요.
내가 말하자 외할머니가 잔잔하게 퍼지는 물결처럼 웃었다.
너는 참 예쁜 아이구나.
외할머니는 오래도록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눈에 잘 띄지도 않는 나를 예뻐한 사람은 외할머니가 처음이었다.
그렇게 뛰쳐나간 외삼촌은 사흘이나 지난 뒤 한밤중에 돌아왔다. 나흘째 아침에 깨니 외삼촌이 세수를 하고 있었다. 햇살이 안개를 한움큼씩 걷어내는 이른 아침이었다. 나는 외삼촌이 세수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수건을 주었다. 외삼촌은 얼굴을 닦고 나서 말했다.
너 강이 보고 싶다고 울었다며?
외삼촌의 말에서 상큼한 치약 냄새와 비누 냄새와 안개 냄새가 났다.
오늘 강에 가자.
외삼촌은 수건을 돌려주며 말했다. 나는 웃음이 나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마당을 폴짝폴짝 뛰었다. 축축한 수건에서도 싱그러운 냄새가 났다. 냄새를 다 맡고 수건을 떼어내니 외삼촌이 마루에 앉아 깨끗하게 씻긴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쑥스러워 텃밭 가장자리까지 달아났다가 자칫했으면 가시나무의 긴 초록색 가지에 찔릴 뻔했다. 정신을 번쩍 차리고 보니 가시와 풀잎과 야채 잎사귀마다 이슬이 매달려 아침 햇빛에 수정처럼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내 무릎이 다 젖은 것은 이슬 때문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갔던 외삼촌은 이불만큼 크고 평평한 튜브를 메고 우리를 데리러 왔다. 검정색에 굵은 골들이 나 있었는데, 그 골마다 바람이 팽팽하게 들어 있는 신기한 고무튜브였다. 외삼촌과 청년 셋과 동네 아이들과 우리, 모두 열 명도 넘었다. 외할머니는 삷은 고구마와 감자와 찐 옥수수를 싸주었다. 강으로 가는 길은, 초등학교와 포도밭 사이의 틈처럼 좁은 풀밭길이 시작이었다. 포도밭가의 풀밭길을 지나니 모랫길이 나타나면서 골이 아득히 긴 수박밭이 펼쳐졌다. 수확이 끝났지만 밧줄처럼 굵고 푸른 수박넝쿨은 끝없이 뻗어 있었다. 넝쿨 끝에 푸른 아기 수박이 자라고 있고 밭 여기저기엔 버려진 수박들이 햇볕 속에 벌건 속을 드러내고 썩어가고 있었다. 꼭 깨진 짐승의 머리통 같기도 했다. 수박이 조금 무서워졌다. 길을 덮은 모래는 점점 더 깊어지더니 땅콩밭을 지날 때는 모래밭으로 변했다. 운동화 속으로 볶은 깨처럼 뜨거운 모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은 슬리퍼를 신고 둥근 튜브를 팔에 걸고 발이 빠지는 뜨거운 모랫길을 잘도 걸어갔다. 외삼촌과 친구들은 이불 같은 튜브를 머리에 이고 일렬로 서서 걸었다. 푸른 강둑이 눈에 보였지만, 걸어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계속해서 걷고는 있었지만 정신이 혼미해지고 눈앞이 혼란스러웠다. 백색 광선이 아른아른 물결치다가 소용돌이가 생기다가 산산이 끊어지며 눈앞의 풍경을 삼키곤 했다.
마침내 가파른 강둑을 타 넘고 올라섰을 때 물 비린내를 품은 길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잠시 혼란을 수습해야 했다. 거기에 용 같은 것은 없었다. 이쪽 강둑과 저쪽 강둑의 양쪽에 모래가, 엄청난 양의 모래가 부려져 있고, 그 가운데로 회청색 물이 흐르고 있었다. 양쪽 강둑은 더 넓었지만 강물의 폭은 그렇게 넓어 보이지 않았다. 강물의 위쪽과 아래쪽은 굽어지면서 시야에서 나타났다가 굽어지며 사라졌기 때문에 끝이 없다는 것을 알 뿐 그 길이를 가늠할 수도 없었다.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둑을 타 넘어 내달았다. 외삼촌과 친구들은 머리에 튜브를 이고 묵묵히 강을 향해 다가갔다. 둑 아래엔 모래가 깊어 무릎까지 푹푹 빠졌다. 불에 달군듯 뜨거운 모래의 늪지였다. 곳곳에 커다란 모래구덩이가 패여 있어서 자칫하면 미끄러지며 빠질 수도 있었다. 나는 도무지 앞으로 가지지가 않아 비틀거리며 발을 옮겼다. 외삼촌과 친구들이 튜브를 놓고 우리를 하나씩 업어다 강가에 내려주었다. 마을 아이들은 이미 강물에 몸을 던져 헤엄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둑 위에서 보던 것과는 달랐다. 두툼하고 끝없이 긴 물결이 빠른 속도로 꿈틀꿈틀 뒤치며 흘러와서 흘러갔다. 그 탁한 물결에 잘못 감기면 빠져나오지 못하고 지옥 끝까지 실려 가버릴 것만 같았다. 우리는 운동화와 옷을 벗고 팬티만 남긴 채 강물 가장자리에 들어가 몸을 적시고 엎드렸다. 강물의 표면은 햇볕에 달구어져 뜨거웠다. 그곳은 물이 고여 있을 뿐 물결은 들어오지 않았다.
저쪽 아래로는 가면 안 돼. 거긴 물귀신이 발목을 당기는 곳이야.
헤엄치던 아이들 중 하나가 일어서서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가장자리 강물은 서 있는 아이의 허리까지 왔다. 우리는 용기를 내어 몇 걸음 더 들어가 보았다. 아래의 강물은 서늘해서 발밑부터 으스스해졌다. 외삼촌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우리를 튜브 위에 올렸다. 정말 푹신푹신한 요 위에 앉은 듯했다. 외삼촌은 우리를 엎드려 눕게 하고 두 친구와 함께 튜브 모서리를 잡아끌며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누워서 튜브를 꼭 쥐었다. 내 심장 소리가 얼굴까지 차고 올라와 귓속에서 울렸다. 외삼촌과 친구들의 몸이 점점 더 강물에 빠지고 있었다. 허리까지, 가슴까지, 어깨까지……. 목까지 잠겼을 때까지 물결의 저항을 버티며 걸어간 그들은 이윽고 몸을 맡기고 아래로 흘러내려 갔다. 표류였다.
강의 가운데서 물결은 더 가파르고 다급하고 높았다. 우리는 주먹을 꽉 쥐고 입을 커다랗게 벌려 소리를 내질렀다. 외삼촌이 잡아주어서 두렵지는 앉았지만 물결이 갑자기 높아지거나 빨라질 때는 내 머릿속에서도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강물 속에 정말 힘센 용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큰 물살을 타 넘어 아래로 흘러내려 가니 튜브는 서서히 강 가장자리로 밀려 나갔다.
가장자리에서 좀 쉰 뒤 다시 위로 올라가 두 번째 표류놀이를 했다. 세 번째 네 번째……. 우리는 소리를 너무 내질러 목이 쉬었고 주먹을 너무 꽉 쥐어 손바닥에 피가 배였고 온몸이 기쁨으로 차올라 날고 있는 것 같았다. 외삼촌과 그들은 우리를 위해 작정한 듯 성가셔하거나 힘들어하지 않고 계속해서 강 가운데로 실어가 주었다.
외삼촌의 키는 중간 정도였지만 몸이 아주 날렵했고 피부는 짙은 구리색이었으며 이목구비는 뚜렷하면서도 부드럽게 생긴 청년이었다. 우리가 쉬는 동안 외삼촌과 친구들은 도강해 반대편 모래변에 앉아 있다가 왔다. 그들은 강 물결에 조금씩 밀리면서 대각선형으로 헤엄쳐 도강했다. 나는 그 대각선형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나도 강을 건너보고 싶어.
외삼촌에게 졸랐지만 외삼촌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위험해.
외할머니가 싸준 간식을 나누어 먹고 외삼촌과 친구들은 강변에 드러누워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잠을 잤다. 나는 어깨와 등의 피부가 따가웠지만 아랑곳없이 물가에서 모래놀이를 했다. 동네 아이들도 지쳤는지 물 가장자리에 퍼질러 앉아 떠들어대며 놀았다. 누구네 소가 더 크고 누구네 개가 더 새끼를 많이 낳았고 누구네 닭이 더 힘이 세고 누구네 토끼가 풀을 더 많이 먹는다고 서로 우겨댔다. 개들이 팔려 가서 심심하다는 말도 했다. 개들이 팔려 가서 사는 곳은 악마들의 마을이라고 했다. 나로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남쪽에 살고 악마들은 북쪽에 산다고 했다. 악마들은 얼굴이 붉고 머리에 뿔이 있고 사람도 먹고 개도 먹는다고 했다. 밭에서 썩어가던 벌건 수박들이 떠올랐다. 악마들의 얼굴도 그렇게 생겼을 것 같았다. 나는 무서워서 돌아앉아 오래성을 다지다가 외삼촌이 수건을 치우고 일어나자 달려가 팔에 매달렸다. 그리고 다시 졸랐다.
외삼촌, 강을 건너보고 싶어.
외삼촌의 굵은 쌍꺼풀이 반쯤 풀려 커튼처럼 내려와 있었다.
은성아, 너도 강 건너고 싶니?
오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외삼촌은 눈을 비비고 난 뒤 친구에게 턱짓을 했다. 은하를 동네 아이들에게 맡기고 오빠와 나는 그들을 따라 강물 안으로 들어갔다. 튜브는 없었다.
조심해야 해.
외삼촌이 모두에게 주의를 주었다. 외삼촌은 나를 안고 그의 친구들은 오빠를 목마 태우고 걸어 들어갔다. 강물이 가슴까지 올라왔을 때 두려움이 몰려왔다. 외삼촌은 꽉 끌어안는 나를 뒤로 돌려 목마를 태웠다. 나는 외삼촌의 목을 두 팔로 고리처럼 걸어 안았다. 그곳에서 보는 강물은 끝없이 길고 막막하게 넓고 물결은 무겁고 흐름은 빨랐다. 물결이 어깨까지 올라왔을 때 외삼촌의 몸이 균형을 잃는 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외삼촌이 몸을 엎드리며 수영을 시작했다. 외삼촌은 온몸을 힘차게 저었지만 아래로 마구 떠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머리 밑에 한기가 들며 등줄기를 따라 진저리가 지나갔다. 외삼촌은 아래로 흘러가며 헤엄을 쳐 강을 비스듬히 잘라 건넜다. 강을 건너 다른 편 강변에 앉았을 때 오빠도 나도 침묵에 빠졌다. 공포에 빠진 것인지 감동한 것인지 슬픈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몸 안에 강물이 가득 밀려들어온 것만 같았고 뭔가 중요한 것을 까맣게 잊고 있는 것같이 허전하기도 했다.
다시 도강을 할 때는 몸을 미는 크고 높고 살찐 물살도 편안했다. 물살은 수없이 많은 부드러운 몸뚱이들처럼 나를 포옹하고는 팔을 풀고 흘러내려갔다. 외삼촌은 팔로 내 엉덩이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 내 허벅지의 부드러운 살을 안고 있었다. 강물은 외삼촌의 허리까지 닿았다가 가슴까지 닿았다. 나는 두 팔로 외삼촌의 목을 꼭 안았다. 외삼촌의 가슴에서 산이 땀 흘릴 때 날 것 같은 냄새가 났다. 외삼촌의 왼손이 허벅지를 지나 천천히 가운데로 다가왔다. 점점 더 가운데로……. 나는 얼굴을 들고 외삼촌의 눈을 바라보았다. 외삼촌은 표정의 변화 없이 내 눈을 마주 보았다. 짙은 눈썹 아래 흑보랏빛 동공이 물처럼 흔들렸다. 처음으로 동공이 액체일 거라는 생각을 들었다. 동공 속에 여름 아침의 이슬이 고여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계속 외삼촌의 동공을 들여다보았다. 팬티 아래까지 다가온 외삼촌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그리고 나를 뒤로 돌려 등에 올렸다. 나는 몸을 펴고 엎드렸다. 우리는 물결을 따라 흘러내려 가기 시작했다. 정신을 잃을 것 같았지만 내 두 팔은 고리처럼 외삼촌의 목에 걸려 있었다.
수심이 깊은 가운데를 빠져나가 조금 기우뚱거리다가 몸을 세우고 걷기 시작했을 때, 물가의 아이들이 소리지르며 어수선하게 뛰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가 물에 빠진 것 같았다. 위로 솟았다가 쑥 가라앉은 아이는 다름 아닌 은하였다. 외삼촌과 친구들은 허둥지둥 몸을 움직여 강 가장자리에 오빠와 나를 내려놓고 젖은 모래를 높이 차올리며 마구 달려갔다.
은하가 빠진 곳은 갑자기 깊게 패인 모래웅덩이라고 했다. 은하는 물을 토하고 난 뒤에도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외삼촌은 우는 은하를 답삭 업었다. 외삼촌의 등은 높아 보였다. 해는 아직도 작열하고 돌아오는 길은 더욱 뜨거웠다. 은하는 울음을 그치는 듯하다가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며 다시 울곤 했다. 땅콩밭을 지날 때 외삼촌이 우는 은하를 내려놓더니 땅콩 줄기를 잡고 당겨보라고 했다. 은하는 울면서도 땅콩 줄기를 당겼다. 그러자 모래밭에 묻혀 있던 줄기들이 주르르 올라왔는데 거기에는 콩깍지 같은 것이 조롱조롱 붙어 있었다. 벌레처럼 생겼는가, 하면 오뚝이처럼도 생겼는데 껍질을 까니 방마다 하나씩 분홍 색깔 얇은 껍질에 덮인 땅콩이 들어 있었다. 은하는 재미있는지 그 옆의 줄기도 당겼다. 그리고는 큭큭대고 웃었다. 일행은 가버리고 땅콩밭에서 노느라 우리만 뒤처졌다. 돌아오는 길에 외삼촌이 내게 물었다.
모래가 뜨거워서 걷기 힘들지?
외삼촌은 아까부터 잠든 은하를 업고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다. 나는 수건을 건네줄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고개를 숙이고 조그맣게 말했다.
외삼촌, 난 뜨거운 모래가 좋아.
외삼촌이 하하 웃었다. 나는 사람들이 웃는 소리가 좋았다. 사람들이 웃고 나면 더 예뻐지곤 했다.
이렇게 뜨거운 모래가 좋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사실은 외삼촌이 좋아,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모래가 좋다고 말해버린 것이었다.
외삼촌은 그날 저녁에 약속이 있다고 나가서는 일주일 동안이나 나타나지 않았다. 오빠와 나는 또 강에 가겠다고 졸라댔지만 은하가 물에 빠진 일을 들은 할머니는 엄하게 금지했다. 그러나 나는 흙과 물고기와 수초 냄새가 아득하게 섞인 흐린 강물 냄새에 취해버렸다. 물의 따스함과 서늘함과 물결에 부딪쳐 반사하는 햇빛의 아릉거림과 물속의 어둡고 깊숙한 그늘이 내 몸 안에서 뒤챘다. 꿈속에서는 두툼하게 살이 오른 물결이 몸을 밀기도 하고 몸을 감기도 하고 혹은 몸을 짓누르기도 했다. 어느 때는 속수무책으로 떠내려가기도 하고 아래로 한도 끝도 없이 끌려 내려가기도 했다. 한낮에 마당에서 놀다가도 몸이 물결 속으로 곤두박질치듯 화들짝 놀랐다. 그럴 때면 강이 부르기라도 한 듯, 강에 가겠다고 울었다. 나는 땅의 밋밋한 바닥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어느 날 할머니가 말했다.
우리 은애가 강에 상사병이 걸렸구나……. 이 동네에도 어느 해 여름에 그런 병에 걸린 남정네가 있었단다. 그 남정네는 매일 강에 가서 이 강변에서 저 강변으로 건너다녔지. 매일매일 강에 들어가더니 태풍이 온 날도 갔단다. 물이 불어난 폭우 속에서도 도강을 했어. 그러다가 떠내려가버렸단다. 어디까지 떠내려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바다까지 가 물고기에게 눈이 파먹혔을 거야……. 그래도 가고 싶으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
그날 외할머니를 앞세우고 뜨거운 길을 지루하게 걸어서 갔지만 강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튜브도 없고 아이들도 없고 외삼촌도, 그 친구들도 웃음소리도 없었다. 모래밭과 강만이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으로 거대했다. 그 강을 건넜다는 사실조차도 믿어지지 않았다. 단지 그 텅 빈 거대함에 압도되어 벙어리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강은 내 기억과 달랐고, 우리는 강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어째서 강이 전과 같지 않은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할머니 말대로 강은 용과 같았다. 용은 단 한 번 우리를 건너게 허용해 준 것이었다. 우리는 돌아서서 둑 위로 올라가 삶은 감자를 먹고 참외를 깎아 먹었다. 나는 목이 막혀 손바닥으로 가슴을 몇 번 쳤다. 그리고 꾹꾹 눌러온 질문을 했다.
외삼촌은 이제 안 와요?
정 없는 놈이 인사 한마디 없이 귀대했다는구나.
귀대요?
군인이 휴가 끝나고 군대에 돌아가는 거야.
뭔지 모르면서도 나는, 단 한 번이라는 알 수 없는 슬픔과 외로움을 경기처럼 경험했다. 강물에 빠졌다가 건져진 은하처럼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지만 꾹꾹 참았다. 딸국질이 나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을 먹은 뒤 할머니는 장에 간다고 양은대야를 머리에 이고 떠났다. 우리가 처음 들어왔던 모랫길을 걸어 나가 버스를 타고 20분이나 간다고 했다. 강변마을은 모든 곳으로부터 아주 먼 곳 같았다. 우리 집에서도.
오빠와 나와 동생은 마을 아이들을 따라 단층 건물 두 동이 서 있는 학교에 가서 오전 내내 놀다가 왠지 시들하고 외로워져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들 곁에 검정색 자동차가 바짝 다가와 스르르 서더니 차문이 열리고 뜻밖에도 아버지가 내렸다. 운전석 옆자리에는 소매 없는 푸른 원피스를 입은 처녀가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이끼빛 선글라스를 벗고 놀란 눈으로 우리를 살펴보았다.
까맣게 탔구나.
우리는 나란히 서서 꾸벅 인사를 했다.
잘 지내고?
우리는 너무 그을려 어깨와 팔뚝에 껍질이 벗겨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운전석 옆자리의 처녀를 다시 보았다. 유리창에 햇빛이 반사되어 동그란 얼굴이 새하얗고 머리카락이 길고 검다는 것밖에 다른 것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쳐다보니 처녀는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관자놀이께에 꽂은 핀이 반짝 빛났다.
뭐 필요한 것은 없어?
나는 속으로 이 사람을 미워할까, 말까 고민하며 아버지를 멀뚱하게 쳐다보았다.
엄마가 보고 싶어요.
나는 입을 내민 채 불쑥 말했다. 왠지 집에 엄마가 없을 것만 같았다.
엄마가 보고 싶다고?
아버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사실 엄마가 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릇을 내던지는 것 같은 엄마의 악다구니도 결코 듣고 싶지 않았다. 사촌 외갓집에서 나는 설거지도 하지 않고 마루도 닦지 않고 심부름도 하지 않고 잔소리도 듣지 않고 그저 놀기만 하며 지낼 수 있었다. 계집애라고 구박하는 할머니도 없었다. 나는 아무 의무 없는 귀한 손님인 것이다. 밤에는 포도를 먹으며 마음껏 노래를 불렀고 사촌 외할머니와 살며 군대 간 외삼촌과 먼 곳에 간 이모를 기다리고 싶었다.
곧 집에 가게 될 거다.
아버지가 지폐를 오빠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오빠도 뭔가에 화가 난 듯했다. 아버지는 다시 차에 올랐다. 그리고 자동차는 먼지를 날리고 떠났다. 돌을 툭툭 차며 걷는데 몇 달 전에 엄마가 했던 말이 문득 생각났다. ‘엄마가 없으모 니가 엄마 대신이다. 동생들 잘 돌봐야 된다. 알것제…….’그 말을 들을 당시에는 생각 없이 흘린 말이었고, 바로 그 순간까지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말이었다. 나는 갑자기 집에 가고 싶어서 자동차가 달려간 길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집에 엄마가 없을 것만 같았다. 오빠와 동생도 이유를 모른 채 나와 함께 달렸다. 트럭과 자동차들이 구름 같은 먼지를 일으키며 우리 곁은 지나갔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사촌 외갓집에 들어서니 외할머니가 외출했던 차림 그대로 멍하니 마루에 앉아있었다. 눈 밑이 짓무른 듯 붉었다. 뭔가 물어볼 말이 있었지만 외할머니가 울고 있으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외할머니는 허둥지둥 손바닥으로 얼굴을 닦고 우리를 불러들였다.
내 새끼들 오나?
외할머니는 우리의 등을 쓸어주었다.
아버지 봤나?
봤어요.
그래, 그래…….
외할머니는 마루에 놓인 양은대야를 다급하게 우리 앞으로 밀고 왔다. 그리고 속에 든 것을 꺼내 허겁지겁 나누어주었다. 플라스틱 머리띠 고무 슬리퍼와 원색 줄무늬 나일론 팬티들과 러닝과 과자였다. 강냉이를 튀긴 과자를 한 자루나 내놓았다. 우리는 과자를 잔뜩 먹은 뒤 새 팬티와 러닝을 입고 슬리퍼를 신고 머리띠까지 두른 채 사철나무로 달려가 매달렸다. 사철나무 붉은 열매는 노래하는 음표들 같았다. 거꾸로 매달려 주렁주렁 매달린 오이들과 옥수숫대 옆구리에 붙어 자라는 수염을 늘어뜨린 알알이 영근 옥수수와 보라색 가지들도 노래 부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시간은 셀 수 없이 지나갔다. 일주일인지, 한 달인지, 일 년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 시간은 멈춘 것 같기도 하고 몸으로 파고들어 살과 피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강처럼 나를 밀고 멀리멀리 흘러가는 것 같기도 했다. 오빠와 은하와 나는 다시 설탕물을 찍어 먹었고 비누방울을 불어 날렸다.
아버지가 우리를 데리러 온 날은 남해안으로 태풍이 지나간 뒤였다. 사흘 동안 폭우가 내려 강물이 둑을 넘어와 땅콩밭이 잠겼다고 했다. 물이 제때 빠지지 않으면 땅콩이 모두 썩게 된다고 했다. 포도밭도 침수되었지만 다행히 포도는 수확이 끝나고 없었다. 학교운동장과 마을길도 침수되었다가 물이 빠져나가 폐허로 변했다. 사촌 외갓집의 대문 앞 변소도 넘쳐 마당과 길이 오물로 뒤덮였다. 우리는 냄새 때문에 코를 잡고 숨을 쉬었다. 말을 할 때는 입으로만 숨을 마시며 괴상한 소리들을 내질렀다. 외할머니는 물이 빠지자마자 오물을 걷어냈지만 그 자리에 커다란 파리떼가 까맣게 뒤덮였다. 할머니는 파리를 쫓느라 냄새가 독한 흰 가루약을 질척이는 마당과 길에 뿌렸다. 그런 와중에 아버지는 마당에 놓인 디딤돌들을 밟고 사촌 외갓집에 들어섰다. 아버지는 외할머니께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우리는 신이 나서 가방을 챙겼다. 악취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외할머니는 마루로 올라가 앉더니 고개를 숙이고 울기 시작했다. 우리는 코를 쥔 채 외할머니 앞에 주르르 서서 인사를 했지만 외할머니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눈물이 할머니 발등에 뚝뚝 떨어졌다. 마당의 디딤돌을 한 발 딛고 가느라 대문을 지날 때에야 돌아보니 외할머니는 그 자리에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나는 코를 쥔 손을 놓고 숨을 힘껏 들이마신 뒤 큰 소리로 한 번 더 인사를 했다. 외할머니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날 잠이 든 채 집에 도착해서 비몽사몽 중에 차에서 내렸을 때 다시 그 처녀를 보았다. 아버지 옆자리에 타고 왔던 처녀였다. 우리가 내리자마자 엄마가 커다란 여행가방을 차 안으로 밀어넣었고 처녀가 떠밀려가는 몸짓으로 뒷자리에 올랐다. 차창 문이 열려 있었기에 처녀의 옆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외할머니 집 액자 속에 있었던 얼굴이었다. 달팽이 모양의 핀이 검고 긴 머리카락 위에서 반짝거렸다. 핀은 모래색이었다.
사촌 이모다. 맞지?
나는 엄마에게 동의를 구했다.
차는 이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떠나버렸다.
이모잖아. 그렇지?
다시 물었을 때 엄마는 내 등을 사정없이 때렸다.
이모는 무슨 이모?
등에 불이 나는 것 같았다. 눈물이 쑥 빠져나왔다. 나는 긴 꿈에서 깨듯 진저리를 쳤다.
집에 들어가니 넷째, 동생이 태어나 있었다. 여동생이라고 했다. 이마가 넓고 눈과 입이 동그란 아기였다. 아기는 엄마 방이 아닌 할머니 방에 누워있었다. 할머니는 우환덩어리라도 피하듯 돌아앉으며 재떨이에 담뱃대를 땅땅 두드려 재를 털었다. 그 소리에 아기가 울음을 터뜨렸다. 복숭아같이 작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매미처럼 악을 쓰며 울었다. 이미 너무 많이 울어 지친 것 같기도 했다.
아기가 우는데도 엄마는 쳐다보지도 않고 묵묵히 물을 데웠다. 그리고는 마당에 내놓은 큰 고무대야에 데운 물을 넣고 찬물을 섞어 가득 채운 뒤 나를 밀어넣었다. 아기는 계속해서 울어댔다. 귀를 후벼 파는 듯한 고음이었다. 입을 꽉 다물고 이태리타월에 비누를 묻혀 내 몸을 힘껏 밀던 엄마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갑자기 소리를 내질렀다. 그 집에서는 한 번도 안 씻겨 주더나? 꼴이 이기 뭐꼬, 시커먼 때 좀 봐라. 아이고, 살이 땡볕에 익다 못해 껍데기가 벗기 지서 삭은 걸레 꼴이 됐다. 날아가던 까마귀가 조상님 조상님 카고 울겄네……. 밥만 믹이모 아를 보는 긴가, 어쩌고저쩌고 하며 엄마는 점점 더 소리 높여 악다구니를 쳤다. 나는 엄마의 악다구니와 아기 울음소리 사이에서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엄마, 아기 좀 달래. 그 말을 한 순간 엄마의 손바닥이 내 등을 내려쳤다. 허리가 폭삭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나는 벌거벗은 채 고무대야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손이 큰데다가 물에 젖기까지 해서 등의 통증이 전기처럼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장독 옆 매화나무 아래에 선 채 울 것 같은 얼굴로 엄마를 쳐다보니 엄마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을 젖은 팔로 닦고 있었다.
그 뒤로도 한동안 강변마을에서 있었던 이야기나 외할머니와 외삼촌, 이모 이야기가 무심코 입에서 튀어나올 때마다 등짝을 맞았다. 그 이해할 수 없는 통증은 비밀을 가르쳤다. 내 기억이 어딘가 떳떳하지 않은 것이다. 말하자면, 입에 올릴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다음 해 여름방학이 되었을 때 나는 강변마을에 가겠다고 부득부득 가방을 쌌다. 엄마는 묵묵부답으로 버티다가 조르는 나를 대문 밖으로 쫓아냈다. 나는 맨발로 담벼락 아래서 한나절을 보내야 했다.
오빠는 어느 날부턴가 강변마을에 대해 입을 굳게 다물더니 과묵해졌고 설탕물을 많이 먹어 앞니가 썩기 시작한 동생은 이내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충치 때문에 설탕물을 금지당한 동생들은 더 많은 비눗방울들을 불어 날렸다.
그 여름의 기억은 굳게 잠긴 자물통처럼 내 몸 안에 묻혔고 나는 점점 더 고독해졌다. 다시는 갈 수 없는 다른 세계에서 있었던 일이었고, 어디에도 입구가 없는 세계에서 일어난 일이었던 것이다. 말하지 않기로 하니,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나 자신이 망상병이 걸린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어쩌다가, 곤한 낮잠이 들 때면, 매듭이 스르르 풀리듯 내 몸은 열려 강물 속으로 흘러간다.
땅바닥보다 더 낮은 바닥을 딛고 한 걸음 한 걸음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 강의 표면은 따스하지만 물 속은 서늘하다. 그 전체를 도무지 알 수 없는 탁하고 깊은 강물은 긴 척추를 휘며 근육이 단단한 물결로 내 몸을 밀기도 하고 감기도 하고 혹은 누르기도 하고 스스로의 부력으로 들어올리기도 하며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나를 데려간다. 나는 속수무책 떠내려가고 아래로 끌려 내려간다. 강물이 얼굴을 덮고 햇볕과 흙과 물고기와 수초의 냄새가 이마를 지나 다리 사이로 지나간다. 여기가 끝이 아니야, 속삭이며 까마득히 낮은 바닥으로 나를 끌어내리는 강, 더 낮은 바닥, 더 낮은 바닥으로…….
그리고 잠이 깨면 대각선을 그으며 아득히 밀려난 어느 낯선 강변이다. 나는 시간의 입자들이 잔광처럼 흩어지는 강변에 앉아 그해 여름이 비눗방울에 실려 둥둥 떠가는 것을 바라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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