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5,18사태에 대한 오마주(?). 듣는 내내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아주 잘 쓰여진 작품이라는 느낌을 갖고.]
아래는 평론가 한상훈님의 이 작품에 대한 글입니다.
. 전성태의 「국화를 안고」 - 그 남자에 대한 그리움
시가나 소설에서 국화에 대한 아름다움이나 애잔한 슬픔을 다룬 작품을 찾아보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번엔 이상문학상(2011) 후보에 올랐던 전성태의 단편 「국화를 안고」를 살펴보자.
화자는 ‘나’도 아니고 ‘그녀’도 아니고, ‘여자’다. 아직 미혼인 화자는 시골의 초등학교 교사로 2층으로 된 연립주택의 사택에서 지내고 있으며, 다른 지방으로 전근을 가려고 하고 있다.
눈이 흩날리는 겨울,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에 이삿짐을 꾸리다가, 절에서 얻어왔던 ‘국화차’를 발견하곤 뜨겁게 마시고 사색에 젖어 바깥 풍경을 바라본다.
‘여자’는 어제 사온 ‘흰 국화’ 한 다발을 들고 조심스럽게 눈길을 나선다. ‘여자’는 탱자나무 울타리 너머 테니스장이 비어있는 데도 ‘공을 치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아직 여명이 오기 전, ‘여자’는 아무도 없는 적막만 고요한 길을 나서는 그 자체가, 비현실적인 세계에 있는 듯한 느낌을 갖는 것이다.
탱자 울타리 가시 틈에 테니스공이 눈에 띄어 빼내려다가 가시에 찔려 포기한다. 두 아들을 의사로 키우고 딸을 잃어버린, 이 마을의 유지인 오 의원 집을 지나며 그 노인에 대한 상념에 젖는다. 그는 학교에서 단골 연사로 초빙되어 강연을 하곤 하는데, 광주 민주화 항쟁을 ‘깡패들이 저지른 소행’이라는 등 어처구니없는 역사관을 지닌 인물이다.
작가가 오 의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단순히 ‘국화’ 소재의 낭만적 소설이 아님을 독자들은 깨닫게 된다. 왜곡된 역사의식을 지닌 노인이 ‘죽음의 한가운데서 살아왔습니다’라는 말에 고향이 ‘광주’인 그녀는 소름이 돋는다.
이틀 전 산책길에 ‘여자’는 장터에서 ‘남자의 어머니’를 만났다. ‘남자’는 ‘광주에서 군인들에게 희생당한 청년’으로 ‘영혼 결혼식’을 올린다고 했는데, 파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깜짝 놀란다. 상대는 18살에 실연으로 약물을 먹고 자살한 오 의원 집 딸이었다.
파혼의 이유는 ‘남자’가 죽기 전에 ‘사귀던 여자’가 있었다는 것. ‘여자’는 어느 날 우연히 산책길에 ‘남자’의 무덤을 보았고, 그에게 비현실적일 만큼 ‘애틋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점차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1980년대 후반 전두환 정부로 드러나면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세계관이 조금씩 전면에 부각된다. ‘여자’는 광주 민주화 운동 때 ‘대학생’으로 “그해의 살육은 그녀에게 아무 피해도 없이” 지나갔지만, 지금도 ‘여전히 우울’했고, 그 시기에 희생된 ‘남자’에게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무덤’은 여자에게 ‘추모탑’같은 존재가 되었고, 그 ‘남자’의 기일을 알고나선 해마다 꽃을 갖고 무덤에 올랐고, 이번에도 바로 다섯 번째, 무덤에 가는 길, 눈이 처음 오는 것이었다. ‘눈 한무더기가 봉긋이 솟아’ 있는 ‘남자’의 무덤 입구에 다다르자 ‘여자’는 “가슴이 벅차 올랐다.”
“만난 적은 없지만 그리운 사람이 비밀처럼 누워 있었다.”
하지만 ‘여자’는 ‘남자’의 무덤에 자기의 눈 발자국의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 ‘남자’의 가족들에게 결례가 되는 것 같아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선다.
“뒤에서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것만 같아 그녀는 여러 번 발걸음을 세웠으나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여자’의 섬세하고 예민한 성격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돌아오는 길에 “살림을 돌보는 보살 모녀”와 젊은 비구니 하월이 혼자 지키고 있는 ‘빈한한 암자’에 들른다. ‘여자’는 여기 절 문 입구에 ‘국화’를 놓고 마당으로 들어선다.
거기서 ‘공양주 보살’을 만나 대화하던 중, 그 ‘남자’ 어머니로부터 음식이 담겨있는 선물 보따리를 받게 되고, ‘남자’가 다시 오 의원 댁 딸하고 오해가 풀려 ‘영혼 결혼식’을 올리게 됐다는 소식을 듣는다. 하월 승은 어머니가 위독해 속가에 갔다가, 눈 때문에 절에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여자’는 자물쇠로 잠겨져 있는 삼신각의 문틈으로 ‘남자’와 영혼 결혼식을 올리게 되는 오 의원 댁 따님의 “머리를 두 갈래로 땋은” 흑백 사진을 흐릿하게 보고 나서, “목숨 걸고 사랑해 본 당신, 부디 행복하길” 진심으로 빈다. 삼신각 토방 한 쪽에 ‘남자’의 무덤에 바치려다 가지고 왔던 ‘국화’ 다발을 내려놓고, 그녀는 조용히 절을 나온다.
오른 쪽 발목이 아파 오 의원 댁 노인에게서 치료를 받고나서, 사택 근처 탱자나무 울타리에 아직도 박혀있는 테니스공을 빼내다가 가시에 찔린다. ‘여자’는 가시로 인해 손등에 맺힌 핏방울을 손수건으로 감싸고, 빼낸 공은 테니스장 안으로 힘껏 던진다.
소설 구조의 시작과 끝 부분에 병렬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테니스공’ 이야기는, 주제와 관련하여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이제 이 마을을 떠나게 되면서 그동안 비현실적으로 마음속으로 간직했던 ‘남자’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마을의 초등학교에 부임하여 온 이후 ‘남자’에 대해 알고 있던 이야기를 썼던 다섯 권의 일기장들을 다 태워버리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작가는 역사에 대해 편견을 지닌 ‘오 의원’댁 따님과 ‘남자’의 ‘영혼 결혼식’을 통해, 역사인식의 대립에서 벗어나 화해의 길목에 들어서야하는 역사적 필연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영혼 결혼식’ 뿐만 아니라, 그동안 ‘여자’가 증오해 왔던 ‘오 의원’댁에서 발목 치료를 받고 나온 에피소드에도 작가의 의식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여자’가 몇 년간 머물렀던 학교에서 ‘전근’ 하게 되어 이삿짐을 꾸리는 행위는, 단순한 거주의 ‘이동’이 아니라, ‘광주 민주화 운동’에 빚졌던 아픔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작품에서 ‘여자’가 지니고 있었던 ‘국화꽃’은 ‘남자’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의 문학적 장치로 작용한다. ‘꽃’을 통해 ‘그리움’의 의미를 문학 속에서 표현하는 작품들은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의 시에도 드러난 것처럼 ‘국화’는 주로 고인에 대한 그리움이나 사랑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화자인 ‘여자’가 ‘국화차’를 마시면서 이야기가 시작된 이 글은, 비구니인 하월 승이 ‘여자’의 집을 찾아와 ‘국화차’를 같이 마시고, 자매처럼 따뜻하게 마음을 교감하면서 끝나고 있다.
하월 승이 나간 후, ‘여자’는 “얼핏 코끝에 국화 향이 풍겨왔다.”고 느끼듯이, ‘국화’는 죽은 남자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 뿐만 아니라, 외로웠던 ‘여자’의 마음에 ‘따뜻함’을 전달해주는 매체 역할을 하고 있다.
[출처] 3. 전성태의 「국화를 안고」 - 그 남자에 대한 그리움|작성자 한상훈
작가 약력
1969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94년 실천문학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매향(埋香)’ ‘국경을 넘는 일’ ‘늑대’, 장편 ‘여자 이발사’가 있다. 세 번째 소설집 ‘두 번의 자화상’에는 등단 20주년을 맞은 작가가 문학의 전환점을 지나며 써내려 간 소설 열두 편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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