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宿金壤縣 - 高兆基

Bawoo 2017. 2. 4. 21:15

 

宿金壤縣(숙금양현) 금양현에 묵으며

 

                                                                        - 高兆基(고조기) 

 

鳥語霜林曉(조어상림효) : 서리 내린 새벽 숲에 새들 재잘거리고

風驚客榻眠(풍경객탑면) : 평상에서 잠자던 나그네 바람에 놀라네

殘半窺月(첨잔반규월) : 처마는 이그러져 달이 엿보는데

人在一涯天(인재일애천) : 이 몸은 아득히 떨어진 타향에 있네.

 

落葉埋歸路(낙엽매귀로) : 나뭇잎 떨어져 귀로에 쌓이고

寒枝宿烟(한지견숙연) : 차가운 가지에 안개 희끄므레 어렸네

江東行未盡(강동행미진) : 언제나 고향 강동에 돌아갈런지

秋盡水村邊(추진수촌변) : 강 마을 어귀에 가을이 저무네.

 

 

榻:① 걸상  ② 베의 이름  ③ 임금의 의자  ④ 길고 좁게 만든 평상 簷:① 처마  ② 모첨(帽簷)  ③ 차양(遮陽)罥:① 얽다  ② 그물  ③ 옭아 맴  ④ 올가미를 만듦

 

[서예 습작]

 

 

고조기 (高兆基)


고려 전기 제주 출신의 문신. |

 

[가계] 본관은 제주. 호는 계림(鷄林). 초명은 고당유(高唐愈)이다. 고을나(高乙那)의 48세손이며 고자견(高自堅)의 3세손이고 아버지는 우복야 고유(高維)이다.

 

[활동사항] 1107년(예종 2)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남쪽 고을의 수령으로 부임하여 청백하게 공무를 보았다.

 

1130년(인종 8) 시어사(侍御使)로 재임할 때 이자겸(李資謙)에게 영합한 관리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다가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으로 좌천되었다. 다시 대관(臺官)이 되어 이자겸의 잔여 세력에 대한 처벌을 여러 자체 제기하였으나 예부낭중(禮部郎中)으로 전직되었다.

1147년(의종 1) 수사공상주국(守司空上柱國)이 되었고, 1148년(의종 2)에는 정당문학판호부사(正堂文學判戶部事)가 되어 지공거(知貢擧)로서 25인의 급제자를 선발하였다. 이어 권판병부사(權判兵部事)·참지정사판병부사(參知政事判兵部事)를 역임하고, 1149년(의종 3)에 정2품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서 판이부사(判吏部事)를 겸임하게 됨으로써 제주 출신 최초로 재상직에 올랐다.

이 무렵 왕의 총애를 받던 내시 김존중(金存中)에게 영합하였다는 이유로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좌천된 적도 있었으나, 다시 중서시랑평장사로 복직하였다. 1150년(의종 4) 12월 인사에서는 아상(亞相)으로 물러났고, 1151년(의종 5) 4월에는 아상인 판병부사에서도 밀려났다.


[저술 및 작품]
「진도벽파정(珍島碧波亭)」이란 시가 전해진다.


[묘소]
묘소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라1동 2464번지 제궁동산에 있다. 고려중서시랑평장사상주국 문경공 고조기 묘비(高麗中書侍郞平章事上柱國 文敬公 高兆基 墓碑)가 세워져 있다.

 

 

[참고문헌]

 

『제주고씨족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김일우, 『고려시대 탐라사 연구』(신서원, 2000)
김찬흡, 『제주사인명사전』(제주문화원, 2002)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시-책 '한국 한시 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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