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시(漢詩) 마당 ♣/- 우리 漢詩

雜興 (잡흥) - 崔惟淸 (최유청)

Bawoo 2017. 2. 5. 21:04



雜興 (잡흥)

                                            - 崔惟淸 (최유청)

春草忽已綠(춘초홀이록) 봄풀 어느 새 푸르르고
滿園蝴蝶飛(만원호접비) 동산엔 나비가 날아다니네
東風欺人睡(동풍기인수) 봄바람 잠든 나를 속여 깨우려
吹起床上衣(취기상상의) 평상 위의 옷자락 펄럭이게 하네 

覺來寂無事(각래적무사) 잠 깨니 고요하고 할 일 없는데
林外射落暉(임외사락휘) 숲 바깥엔 저녁볕 쏟아지네
倚檻欲嘆息(의함욕탄식) 난간에 기대 탄식하렸더니
靜然已忘機(정연이망기) 고요히 이미 만사 잊었네



최유청 (崔惟)1093(선종 10)∼1174(명종 4). 고려 중기의 학자이자 문신.

본관은 창원. 자는 직재. 고려의 건국공신인 준옹(俊邕)의 6세손이며, 문종·순종·선종의 3조(朝)를 섬긴 석(奭)의 아들로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다. 예종 때 과거에 급제했으나 학문이 완성되지 않았다 하여 벼슬을 하지 않고 독서에만 힘썼다. 후에 추천을 받아 직한림원이 되었으나 인종초에 이자겸의 계략으로 파직당했다. 이자겸이 몰락한 뒤 내시부에 들어갔으며 좌사간이 되었다. 상주군수로 나갔을 때 덕정을 베풀었다는 평을 들었다. 이어 간의대부가 되어 금(金)에 사신으로 갔는데, 언동이 모두 예(禮)에 맞아 그곳 사람들이 탄복했으며 돌아올 무렵에는 호부시랑을 제수했다.


의종이 즉위하자 한림학사로 〈서경 書經〉의 열명편을 왕에게 강(講)했다. 벼슬이 계속 올라 1150년에는 중서시랑평장사에 이르고 판병부사를 겸했으나, 처남인 내시낭중 정서가 참소를 입고 귀양가는데 연루되어 남경유수사로 좌천되었다. 1170년 정중부의 난 때는 평소 그의 덕망에 감화한 무신들이 그를 보호했다. 명종이 즉위하자 중서시랑평장사에 다시 임명되었고 이어 수사공집현전대학사판예부사로 치사했다.

경사에 해박했으며, 불경에도 관심이 깊어 많은 학생과 승려의 자문에 응했다. 왕의 조서를 받들어 〈이한림집 李翰林集〉을 편찬했고 〈유문사실 柳文事實〉을 주해했다. 문집에 〈남도집 南都集〉이 있으며 〈동문선〉에 6수의 시와 45편의 문이 실려 있다. 시호는 문숙이다.[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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