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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坐 - 徐居正

Bawoo 2017. 2. 16. 22:08


獨 坐

                             徐居正


獨坐無來客 [독좌무래객] 홀로 앉아 있고 찾아오는 이 없는데

空庭雨氣昏 [공정우기혼] 빈 뜰엔 비 기운으로 어둑하구나.

魚搖荷葉動 [어요하엽동] 물고기가 흔드는지 연잎 흔들거리고

鵲踏樹梢飜 [작답수초번] 까치는 나뭇가지끝 밟고 날아오른다

琴潤絃猶響 [금윤현유향] 거문고 젖었으나 아직 소리 나고

爐寒火尙存 [로한화상존] 화로 식었지만 불씨는 남아 있다.

妨出入 [이도방출입] 진흙길이 출입을 가로 막고 있으니

終日可關門 [종일가관문] 종일토록  문 닫아걸고 그냥 있구나




우듬지 초 /① 우듬지 ② 끝 ③ 꼬리 ④ 장대

뒤칠 번 /① 뒤치다 ② 날다 ③ 넘치다 ④ 엎어짐


이도 [泥塗] 땅이 질어서 질퍽질퍽한 길



[서예 습작]

 

서거정 [徐居正]

(자원(子元), 강중(剛中), 사가정(四佳亭), 정정정(亭亭亭))

1420(세종 2)∼1488(성종 19). 조선 전기의 문신. | 개설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강중(剛中)·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정(亭亭亭). 서익진(徐益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전서(戶曹典書) 서의(徐義)이고, 아버지는 목사(牧使) 서미성(徐彌性)이다. 어머니는 권근(權近)의 딸이다. 최항(崔恒)이 그의 자형(姉兄)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조수(趙須)·유방선(柳方善) 등에게 배웠으며, 학문이 매우 넓어 천문(天文)·지리(地理)·의약(醫藥)·복서(卜筮)·성명(性命)·풍수(風水)에까지 관통하였다.


문장에 일가를 이루고, 특히 시(詩)에 능하였다. 1438년(세종 20)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444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에 제수되었다.

그 뒤 집현전박사·경연사경(經筵司經)이 되고, 1447년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지제교 겸 세자우정자(知製敎兼世子右正字)로 승진하였다.


1451년(문종 1)에는 부교리(副校理)에 올랐다. 1453년수양대군(首陽大君)을 따라 명나라에 종사관(從事官)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1455년(세조 1) 세자우필선(世子右弼善)이 되고, 1456년 집현전이 혁파되자 성균사예(成均司藝)로 옮겼다.


일찍이 조맹부(趙孟頫)의 <적벽부 赤壁賦>글자를 모아 칠언절구 16수를 지었는데, 매우 청려해 세조가 이를 보고 감탄했다 한다. 1457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 우사간·지제교에 초수(招授)되었다. 1458년 정시(庭試)에서 우등해 공조참의·지제교에 올랐다가 곧이어 예조참의로 옮겼다.

세조의 명으로 『오행총괄(五行摠括)』을 저술하였다. 1460년 이조참의로 옮기고, 사은사(謝恩使)로서 중국에 갔을 때 통주관(通州館)에서 안남사신(安南使臣)과 시재(詩才)를 겨루어 탄복을 받았으며, 요동인 구제(丘霽)는 그의 초고를 보고 감탄했다 한다.


1465년 예문관제학·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를 거쳐, 다음 해 발영시(拔英試)에 을과로 급제, 예조참판이 되었다. 이어 등준시(登俊試)에 3등으로 급제해 행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에 특가(特加)되었으며, 『경국대전』 찬수에도 참가하였다.

1467년 형조판서로서 예문관대제학·성균관지사를 겸해 문형(文衡)을 관장했으며, 국가의 전책(典冊)과 사명(詞命)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1470년(성종 1) 좌참찬이 되었고, 1471년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 3등에 녹훈되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1474년 다시 군(君)에 봉해지고 좌참찬에 복배되었다. 1476년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중국사신을 맞이했는데, 수창(酬唱: 시로써 서로의 마음을 문답함)을 잘해 기재(奇才)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 해 우찬성에 오르고, 『삼국사절요』를 공편했으며, 1477년 달성군에 다시 봉해지고 도총관(都摠管)을 겸하였다. 다음해 대제학을 겸직했고, 곧이어 한성부판윤에 제수되었다. 이 해 『동문선』 130권을 신찬하였다.


1479년 이조판서가 되어 송나라 제도에 의거해 문과의 관시(館試)·한성시(漢城試)·향시(鄕試)에서 일곱번 합격한 자를 서용하는 법을 세웠다.

1480년『오자(吳子)』를 주석하고, 『역대연표(歷代年表)』를 찬진하였다. 1481년『신찬동국여지승람』 50권을 찬진하고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1483년 좌찬성에 제수되었다. 1485년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했으며, 이 해 『동국통감』 57권을 완성해 바쳤다. 1486년『필원잡기(筆苑雜記)』를 저술, 사관(史官)의 결락을 보충하였다.


1487년 왕세자가 입학하자 박사가 되어 『논어』를 강했으며, 다음 해 죽었다. 여섯 왕을 섬겨 45년 간 조정에 봉사, 23년 간 문형을 관장하고, 23차에 걸쳐 과거 시험을 관장해 많은 인재를 뽑았다.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사가집(四佳集)』이 전한다. 공동 찬집으로 『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동문선』·『경국대전』·『연주시격언해(聯珠詩格言解)』가 있고, 개인 저술로서 『역대연표』·『동인시화(東人詩話)≫·『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필원잡기』·『동인시문(東人詩文)』 등이 있다.


조선 초기 세종에서 성종대까지 문병(文柄)을 장악했던 핵심적 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학풍과 사상은 이른바 15세기 관학(官學)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훈신(勳臣)의 입장을 반영하였다.

그의 한문학에 대한 입장은 『동문선』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우리나라 한문학의 독자성을 내세우면서 우리나라 역대 한문학의 정수를 모은 『동문선』을 편찬했는데, 그의 한문학 자체가 그러한 입장에서 형성되어 자기 개성을 뚜렷이 가졌던 것이다.

또한, 그의 역사 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는 『삼국사절요』·『동국여지승람』·『동국통감』에 실린 그의 서문과 『필원잡기』에 실린 내용이다. 『삼국사절요』의 서문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세력이 서로 대등하다는 이른바 삼국균적(三國均敵)을 내세우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서문에서는 우리나라가 단군(檀君)이 조국(肇國: 처음 나라를 세움)하고, 기자(箕子)가 수봉(受封: 봉토를 받음)한 이래로 삼국·고려시대에 넓은 강역을 차지했음을 자랑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은 이러한 영토에 대한 자부심과 역사 전통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중국의 『방여승람(方輿勝覽)』이나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와 맞먹는 우리나라 독자적 지리지로서 편찬된 것이다.

이와 같이, 그가 주동해 편찬된 사서·지리지·문학서 등은 전반적으로 왕명에 따라 사림 인사의 참여 하에 개찬되었다. 이렇듯 많은 문화적 업적을 남겼지만, 성종이나 사림들과 전적으로 투합된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해동잡록(海東雜錄)』
  • 『대동기문(大東奇聞)』
  • 『조선전기사학사연구』(한영우, 서울대학교출판부,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