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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竹陰- 申翊聖

Bawoo 2017. 3. 17. 23:06

寄竹陰 나무 그늘에 부쳐

                                                                     申翊聖

[도사은근의]신도 거꾸로  신은 은근한 마음은
[피금갱파배]옷깃 풀고 다시 술잔 잡으려는 것
[미명차야월]희미한 이 밤 달빛에

[욕락거년매]해  넘긴 매화 지려 하는구나
[연어감성학]가벼운 말은 술김에 농지거리 되고
[신시노견재]새로 지은 시는 늙어가며  솜씨 보이네
[정녕후기재]정녕 뒷기약 있을 터이라고
[산곽답창태]산성에  푸른 이끼 밟아가노라



신익성

신익성(申翊聖, 1588년 ~ 1644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선조의 딸 정숙옹주의 부군으로 자(字)는 군석(君奭), 호(號)는 낙전당(樂全堂), 본관은 평산이다.《국역 국조인물고》 권63 노난시 입절 정토인(虜難時立節征討人) 피구인부(被拘人附) 신익성의 비명(碑銘) 12세에 정숙옹주와 결혼하여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졌다.광해군 때 폐모론을 적극 반대하였다.[3] 1627년에 정숙옹주와 사별하였고[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서 왕을 모시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주화파 대신들이 세자를 적에게 인질로 보내 화의를 맺자고 주장하자 칼로 위협까지 해가며 반대하였다. 후에 시론을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김상헌·최명길 등과 함께 선양으로 잡혀갔으나[5], 후에 소현세자의 덕으로 무사하였다.[6] 효성이 지극하고 글과 글씨에 능했다. 저서로 《낙전당집》이 있다.[위키백과]

각주

  1. 이동: 《국역 국조인물고》 권63 노난시 입절 정토인(虜難時立節征討人) 피구인부(被拘人附) 신익성의 비명(碑銘)
  2. 이동 《조선왕조실록》 선조 119권, 32년(1599 기해 / 명 만력(萬曆) 27년) 11월 26일(신미) 2번째기사
  3. 이동 《조선왕조실록》 광해 124권, 10년(1618 무오 / 명 만력(萬曆) 46년) 2월 9일(기해) 7번째기사
  4. 이동 《조선왕조실록》 인조 17권, 5년(1627 정묘 / 명 천계(天啓) 7년) 11월 6일(기사) 2번째기사
  5. 이동 《조선왕조실록》 인조 43권, 20년(1642 임오 / 명 숭정(崇禎) 15년) 12월 11일(병자) 1번째기사
  6. 이동 《조선왕조실록》 인조 44권, 21년(1643 계미 / 명 숭정(崇禎) 16년) 2월 11일(을해) 1번째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