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集吳伯玉巖亭李宜叔洪養之梓黃大卿景源俱 - 南有容

Bawoo 2017. 3. 23. 22:11




集吳伯玉巖亭李宜叔洪養之梓黃大卿景源俱

[오원의 옥암정자에 이천보 홍자 황경원과 모여]

                                                                                       南有容


春陰歇遊騎 [춘음유기]봄 날씨 흐린 탓에  말타기를 그쳤는데

滿地柳條靑 [만지류조청]천지에 가득한 버드나무 가지마다 푸르다 

山色隨移杖 [산색수이장]산 빛깔 짚은 지팡이 움직일 때마다 다르고

池心照倚亭 [지심조의정]못 가운데는  정자가  비스듬히 비치는구나

淸雲意俱遠 [청운의구원]맑은 구름은 아득히 멀기만 한데

幽鳥酒初醒 [유조주초성]그윽한 새소리는 술이 막 깨게 한다

曠眺村墟晩 [광조촌허만]멀리 바라보이는 마을은 저녁이라서인지

人烟生窈冥 [인연생요명]어두운 가운데도  밥짓는 연기 피어오른다


[아래 -전문 한학자 번역]


봄 그늘에 봄 그늘에 가던 말 멈추니

늘어진 버들가지 땅에 가득 푸르다.
산빛은 옮기는 지팡이에 따르고
못 물살은 기대인 난간마다 달리 비치네.
맑은 구름 보며  뜻이 함께 멀고
그윽한 새소리에 술이 막 깬다.
멀리 바라보는 마을의  저녁 무렵
밥 짓는 연기 어둑신함 속에서 인다.


[참고]

意:② 감탄사 ③ 아아!

村墟:시골장터

人烟:① 밥 짓는 연기 ② 사람의 그림자 ③ 인가(人家) ④ 사람의 모습

窈冥:① 깊숙하고 컴컴하다




[서예 습작]


 

남유용(덕재(德哉), 뇌연(雷淵), 소화(小華))                         
    남유용

    1698(숙종 24)-1773(영조 49). 조선 후기의 문신. 실박하고 바른말을 잘하고 청백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698(숙종 24)∼1773(영조 49). 조선 후기의 문신. | 개설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덕재(德哉), 호는 뇌연(雷淵)·소화(小華). 서울 출신. 증조할아버지는 대제학 용익(龍翼)으로, 할아버지는 대사헌 정중(正重), 아버지는 동지돈녕부사 한기(漢紀), 어머니는 청송심씨(靑松沈氏)이다.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21년(경종 1)에 진사가 되고, 강릉참봉(康陵參奉)·종묘서부봉사·세자익위사시직·군자감주부·형조좌랑·

    영춘현감(永春縣監)을 지낸 뒤 1740년(영조 16)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그해에 정언이 되었다.

    이때에 간관은 의리를 궁극적으로 밝히는 것이 임무이므로 필요하다면 시비를 끝없이 따져야 한다는 간관지책(諫官之責)에 대한 상소를 올렸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탕평책을 제일의 국시로 삼고 당인(黨人)들의 자작의리(自作義理)를 배격했던 영조에게는 대단히 거슬리는 상소였기 때문에, 정의(旌義)에 찬배시키려 했다. 그러나 다른 대신들의 만류로 해남으로 찬배되었다.

    그 뒤 1724년 풀려나 직첩을 되돌려받았다. 1743년부터 홍문관에서 부교리·부수찬·응교·교리 등과 세자시강원의 문학·필선·보덕 등의 직과 사간·장령, 서학·동학·중학 등의 교수를 거쳤다.

    1747년 응교로 있을 때에는 군덕10조(君德十條)를 진언했는데 군주의 성실을 특히 강조했다. 1748년 통정(通政)으로 승계한 뒤부터 승지·판결사·형조참의를 역임했다.


    1752년 가선(嘉善)으로 승계한 뒤 승문원제조·대사성·예조참판·예문관제학·홍문관제학 등을 거쳐, 1754년에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이 되어 뒤에 정조가 된 세손을 세살 때 무릎에 앉혀놓고 글을 가르쳤다. 이런 인연으로 정조는 그 은덕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1755년≪천의리편 闡義理編≫의 찬집당상을 겸직하고, 비변사제조·예문관제학·병조참판·세자좌부빈객·병조참판·대사헌·대사성을 거치고, 1757년에는 원손사부(元孫師傅)가 되어 호랑이 가죽을 하사받았다.

    이어 호조참판을 거친 뒤 1758년 전 대제학 윤봉조(尹鳳朝)의 추천을 받아 양관(兩館) 대제학과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겸했으며, 그밖에 여러 곳의 제조직을 받았다. 1765년에는 지중추부사와 형조판서가 되었다.


    1766년 정헌(正憲)으로 승계한 뒤 상소를 올려 벼슬 길에서 물러났으며, 1767년 봉조하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1772년≪명사정강 明史正綱≫을 편찬했으나, 서법이 존주지의(尊周之義)에 심히 어긋난다고 하여 영조는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이는 그의 역사관이 성리학적 역사인식 방법을 극복하고자 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로 말미암아 장차 조선사기(朝鮮史記)를 편찬할 인물이라는 평을 받은 바 있으며,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측책문을 제진하여 칭송을 받았다.


    인물됨이 실박하면서도 바른말을 잘하고 청백했으며,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저서로는 ≪명사정강≫·

    ≪천의리편≫·≪뇌연집≫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단양에 있는 우화교비(羽化橋碑)와 해백윤세수비(海伯尹世綏碑)를 쓴 글씨가 있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
    • 『정조실록』
    • 『국조방목』
    • 『고서당집(古書堂集)』
    • 『뇌연집(雷淵集)』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조선총독부 편, 아세아문화사, 1976)(조선총독부 편, 아세아문화사,
    • 1976)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