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시(漢詩) 마당 ♣/- 우리 漢詩

無題 - 金時習

Bawoo 2017. 4. 11. 22:37


無題

                                          金時習

 


 

終日芒鞋信脚行(종일망혜신각행) 온종일 짚신 신고 발길 닿는 대로 가노라니

一山行盡一山靑(일산행진일산청) 한 산을 다 걷고 나면 또 다른 푸른 산

心非有想奚形役(심비유상해형역) 마음에 생각 없으니 어찌 몸의 부림을 받으며

道本無名豈假成(도본무명기가성) 도는 본래 이름 없는데 어찌 거짓으로 이루랴

宿露未晞山鳥語(숙로미희산조어) 간밤 이슬 아직 마르지 않았으나 산새 지저귀고

春風不盡野花明(충풍부진야화명) 가없는 봄바람에 들꽃은 화사하구나

短筇歸去千峯靜(단공귀거천봉정) 짧은 지팡이 짚고 돌아가노라니 봉우리마다 고요한데

翠壁亂煙生晩晴(취벽란연생만청) 푸른 절벽에 자욱하던  안개  저녁 무렵 되니 걷히누나

 

 

[서예 습작]

 

〈감상〉

이 시는 준상인(峻上人)에게 준 시의 하나로, 앞 시와 마찬가지로 산수벽(山水癖)을 보여 주는 시이다.

 

 

짚신 신고 발길 닿는 대로 종일 걸으니, 산 하나를 지나면 또 다른 산이 나타나지만 그 산이 싫지 않다. 마음에 공명(功名)이나 이록(利祿)에 대한 집착이 없으니 육체의 부림을 받지 않고 노자(老子)의 말대로 도는 이름할 수 없으니 억지로 깨닫고자 하지도 않는다. 간밤 내린 이슬이 마르지 않은 채 울어 대는 산새나 부단히 불어와 핀 들꽃은 내 마음을 끌리게 한다. 짧은 지팡이를 짚고 가노라니, 모든 산은 조용한 가운데 푸른 절벽에 머물던 자욱한 안개가 생겨났다가 저녁이 되니 맑게 갠다.

 

 

이 시에 대해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에서, “동봉 김시습은 5살 때 벌써 기이한 아이로 소문났다. 세종임금이 동봉을 불러 「삼각산」시로 시험해 보고,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그 뒤 동봉은 미친 사람 흉내를 내고 중이 되어 산중에서 살았다. 동봉이 지은 시가 대단히 많은데, 모두 입에서 나오는 대로, 손에서 쓰이는 대로 지었다. 흥취만을 풀어낼 뿐이요, 일찍이 퇴고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경지가 높아서 보통 사람이 미칠 수가 없다. 그의 「무제」는 다음과 같다. ······도를 깨친 자가 아니면 어찌 이런 말을 하겠는가(金東峯時習五歲以奇童名(김동봉시습오세이기동명) 英廟召試三角山詩(영묘소시삼각산시) 大奇之(대기지) 後佯狂爲髡(후양광위곤) 居山中(거산중) 所賦詩極多(소부시극다) 皆率口信手(개솔구신수) 止遣興而已(지견흥이이) 未嘗留意推敲(미상류의추고) 然所造超越(연소조초월) 有非凡人所可及(유비범인소가급) 其無題詩(기무제시) ······非悟道者(비오도자) 寧有此語(영유차어))?”라 하였다.

 

 

〈주석〉

〖無題(무제)〗 『매월당집』에는 「증준상인(贈峻上人)」으로 되어 있음. 〖芒鞋(망혜)〗 짚신. 〖信脚(신각)〗 발 닿는 대로 감. 〖形役(형역)〗 몸이 구속되거나 사역당하는 것으로, 공명(功名)이나 이록(利祿)에 끌리거나 지배당하는 것을 이름.

 

〖道本無名(도본무명)〗 『노자(老子)』에 “도라 할 수 있는 도는 항상 된 도가 아니고, 이름 부를 수 있는 이름은 항상 된 이름이 아니다. 무명은 천지의 시작이요, 유명은 만물의 어머니이다(道可道(도가도) 非常道(비상도) 名可名(명가명) 非常名(비상명) 無名天地之始(무명천지지시) 有名萬物之母(유명만물지모)).”라는 말이 보임.

〖晞〗 마르다 희, 〖筇〗 지팡이 공, 〖翠〗 비취색 취

 

각주

1 김시습(金時習, 1435, 세종 17~1493, 성종 24):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 5세 때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후일 중용하리란 약속과 함께 비단을 하사받아 오세신동(五歲神童)이라 일컬어졌다. 과거준비로 삼각산(三角山) 중흥사(中興寺)에서 수학하던 21세 때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대권을 잡은 소식을 듣자 그 길로 삭발하고 중이 되어 방랑의 길을 떠났다. 31세 되던 세조 11년 봄에 경주 남산(湳山) 금오산(金鰲山)에서 성리학(性理學)과 불교에 대해서 연구하는 한편,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다. 그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 속에서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못한 채 기구한 일생을 보냈는데, 그의 사상과 문학은 이러한 고민에서 비롯한 것이다.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얻은 생활체험은 현실을 직시하는 비판력을 갖출 수 있도록 시야를 넓게 했다. 그의 현실의 모순에 대한 비판은 불의한 위정자들에 대한 비판과 맞닿으면서 중민(重民)에 기초한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상을 구가하는 사상으로 확립된다. 그의 저작은 자못 다채롭다고 할 만큼, 조선 전기의 사상에서 그 근원을 찾아보기 어려운 유·불 관계의 논문들을 남기고 있다. 이 같은 면은 그가 이른바 ‘심유천불(心儒踐佛)’이니 ‘불적이유행(佛跡而儒行)’이라 타인에게 인식되었듯이 그의 사상은 유불적인 요소가 혼효되어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는 근본사상은 유교에 두고 아울러 불교적 사색을 병행하였으니, 한편으로 선가(禪家)의 교리를 좋아하여 체득해 보고자 노력하면서 선가의 교리를 유가의 사상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후대에 성리학의 대가로 알려진 이황으로부터 ‘색은행괴(索隱行怪)’ 하는 하나의 이인(異人)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해설 출처:cafe.daum.net/jangdalsoo/d2Zk/51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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