宿開岩寺
權遇
石徑縈廻上翠微(석경영회상취미) 돌길 돌고 돌아 오른 산중턱
放驢扶杖到禪扉(방려부장도선비) 나귀 놔두고 지팡이 짚어 절문에 이르렀네.
月明措大吟詩席(월명조대음시석) 달빛은 선비의 시 읊는 자리 밝혀주고
燈映闍梨入定衣(등영사리입정의) 등불은 선정에 든 고승의 옷자락을 비추네.
論道未知誰得道(논도미지수득도) 도를 논하지만 누가 얻었는지 알 수 없으니
應機爭似自忘機(응기쟁사자망기) 세상을 따름이 어찌 세상을 잊음과 같으리오.
曾聞一宿曾成覺(증문일숙증성각) 일찍이 한 번 자고도 깨달음을 얻었다 들었는데
我亦從前絶是非(아역종전절시비) 나 또한 전부터 시비를 끊었노라.
*翠微(취미):산꼭대기에 조금 못 미치는 곳. 산에 어렴풋이 끼어 있는 이내
*措大(조대):청렴결백한 선비
*闍梨(사리):阿闍梨(아사리. 梵語). 중들에게 덕행을 가르치는 스승. 高僧(고승)
[서예 습작]
권우(權遇, 1363년 - 1419년)는 고려 말기·조선 초기의 학자이며, 포은 정몽주의 제자이자 세종대왕, 학역재 정인지의 스승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처음 이름은 권원(權遠), 처음 자는 중려(仲慮)였고 뒤에 자를 여보(慮甫)로 바꾸었다. 어려서 학문을 배우고, 뒤에 포은 정몽주의 제자가 되었다.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처음 이름은 권원(權遠), 처음 자는 중려(仲慮)였고 뒤에 자를 여보(慮甫)로 바꾸었다.
어려서 학문을 배우고, 뒤에 포은 정몽주의 제자가 되었다. 1385년 우왕 11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박사를 거쳐 이조좌랑 등을 지냈다. 조선이 건국한 뒤에는 예문관 제학에 올랐으며, 충녕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자 빈객이 되어 세종에게 경사를 가르쳤다. 호 매헌(梅軒). 검교정승(檢校政丞)을 지낸 권희(權僖)의 아들이다.
어려서는 형 권근에게서 배웠고, 자라서는 정몽주(鄭夢周) 문하에서 수학하고, 1385년 우왕 11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성균관박사를 거쳐 공양왕 말에 이조좌랑이 되었다. 그러나 스승인 정몽주나 동문인 길재, 이숭인 등과는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여 역성혁명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한편 교육에도 적극성을 보여 정인지 등의 문하생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1392년 7월 조선이 건국한 뒤에도 계속 관직에 머물러 있었다. 이후 교서감승(校書監丞), 군기감승(軍器監丞) 등을 거쳐서 예문관제학에 올랐으며, 1418년 태종 18년 에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빈객(賓客)이 되어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다. 세종의 즉위를 본 후 1419년에 죽었다.
글씨를 잘 쓰고 시문에 능하였으며, 성리학과 주역에 밝았다. 저서로 《매헌집》(梅軒集), 글씨로 충청북도 충주에 소재한 <화산군권근신도비>(花山君權近神道碑) 등이 있다.
그의 스승은 정몽주였으나 왕자시절의 충녕대군(훗날의 세종대왕)이 그의 동문이었고 그밖에 그의 동문들, 그가 후에 길러낸 제자들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수도 적었고, 출사하지 않은 그의 동문 길재의 제자들 만큼 빛을 보지 못하였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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