遊智異山
- 李仁老(이인로)
頭流山逈暮雲低(두류산형모운저) 멀리 구름 아래 두류산 저물고 있고
萬壑千岩似會稽(만학천암사회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골짜기와 바위는 회계산 같구나.
策杖欲尋靑鶴洞(책사욕심청학동) 지팡이 짚고 청학동을 찾으려 하는데
隔林空聽白猿啼(격림공청백원제) 멀리 숲 밖에서 부질없는 잔나비 소리 들리는구나.
樓坮縹緲三山根(누대표묘산산근) 누대 아득히 먼 것이 삼신산의 근원인 둣 싶은데
苔蘇依稀四字題(태소의희사자제) 이끼에 묻혀 희미한 네 글자 보이는구나
試問仙源何處是(시문선원하처시) 무릉도원이 어디인가 물으려 하는데
落花流水使人迷(낙화류수사인미) 낙화유수는 사람을 미혹하는구나
逈:① 멀다 ② 판이하다 ③ 아주 ④ 아주 다르다
縹緲:① 멀고 어렴풋하다 ② 소리가 연하고 길게 이끌리는 모양 ③ 가물가물하고 희미하다
落花流水:떨어지는 꽃과 흐르는 물이라는 뜻으로, 가는 봄의 경치나 세력이 보잘것없이 쇠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중국]① 늦은 봄의 경치 ② 참패하다 ③ 쇠퇴하다 ④ 산산이 부서지다
頭流山:경상남도
[서예 습작]
이인로 (미수(眉叟), 李仁老)
1152(의종 6)∼1220(고종 7). 고려 후기의 문신.
| 개설: 본관은 경원(慶源). 초명은 득옥(得玉). 자는 미수(眉叟), 호는 쌍명재(雙明齋). 증조부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이오(李䫨)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을 볼 수 없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이인로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데 없는 고아되었다. 화엄승통(華嚴僧統 ; 화엄종의 우두머리)인 요일(寥一)이 그를 거두어 양육하고 공부를 시켰다. 그래서 유교 전적과 제자백가서를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다. 1170년 그의 나이 19세 때에 정중부(鄭仲夫)가 무신란을
일으키고, “문관을 쓴 자는 서리(胥吏)라도 죽여서 씨를 남기지 말라.” 하며 횡행하자, 피신하여 불문(佛門)에 귀의하였다. 그 뒤에 환속하였다.
이인로는 25세 때에 태학에 들어가 육경(六經)을 두루 학습하였다. 1180년(명종 10) 29세 때에는 진사과에 장원급제함으로써 명성이 사림에 떨쳤다. 31세 때인 1182년 금나라 하정사행(賀正使行)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하였다. 다음해 귀국하여 계양군(桂陽郡) 서기로 임명되었다. 그 뒤에 문극겸(文克謙)의 천거로 한림원에 보직되어 사소(詞疏)를 담당하였다. 한림원에서 고원(誥院)에 이르기까지 14년간 그는 조칙(詔勅)을 짓는 여가에도 시사(詩詞)를 짓되 막힘이 없었다. 그래서 ‘복고(腹藁)’라는 일컬음을 들었다.
이인로는 임춘(林椿)·오세재(吳世才) 등과 어울려 시와 술로 즐기며 세칭 ‘죽림고회(竹林高會)’를 이루어 활동하였다.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郎)·비서감우간의대부(秘書監右諫議大夫)를 역임하였다. 아들 세황(世黃)의 기록에 의하면 “문장의 역량을 자부하면서도 제형(提衡 : 과거의 시관)이 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다가 좌간의대부에 올라 시관(試官)의 명을 받았다. 그러나 시석(試席)을 열어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가 역임한 최후의 관직은 좌간의대부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열전(列傳)에서 이인로에 대하여 “성미가 편벽하고 급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거슬려서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性偏急 忤當世 不爲大用).”라고 평하였다. 그 자신은 문학 역량에 대하여 자부가 컸으나 크게 쓰이지 못하여 이상과 현실간의 거리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인로의 문학사상의 골자는 시의 본질과 그 독자적 가치에 대한 인식, 그리고 ‘어의구묘(語意俱妙 ; 말과 뜻이 함께 묘함을 갖추어야 한다)’를 강조한 작시론(作詩論)이라 하겠다. 또한 어묘를 위해서는 무부착지흔(無斧鑿之痕 ;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움)의 자연생성의 경지를, 의묘(意妙 ; 뜻의 묘함)를 위해서는 신의(新意 ; 새로운 뜻)를 중시하였다.
이인로의 저술로는 『은대집(銀臺集)』·『쌍명재집』·『파한집』 등이 있다고 하나 『파한집』만이 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파한집(破閑集)』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 『보한집(補閑集)』
- 『고려조한문학연구』(서수생, 형설출판사, 1971)
- 「이인로의 현실관과 문학사상」(김진영, 『관악어문연구』 4, 서울대학교국어국문학과, 1979)
- 「고려죽림고회연구」(이동환, 고려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68)
'♣ 한시(漢詩) 마당 ♣ > - 우리 漢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順興宿水寺樓 -노여(魯璵) (0) | 2017.04.09 |
---|---|
月桂寺晩眺 - 陳澕 (0) | 2017.04.08 |
開聖寺八尺房 -鄭知常 (0) | 2017.04.03 |
증 청평이거사(贈淸平李居士) - 곽여(郭輿) (0) | 2017.04.02 |
涇州龍朔寺-朴仁範 (0) | 2017.04.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