贈印上人
-姜渾
[문거하사고구시:묻노니 어찌 애써 시를 지으려 하시는가
[묘재난언인부지: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묘한 맛이 있어서라네
[반학송성승정후:스님 잠들고 나니 골짜기에선 소나무 소리 들리고
[만루산색설청시:눈 그치니 누각엔 산빛이 가득하구나
[임한유소응빙조:차가운 숲, 깊은 못에는 때 이른 얼음이 얼고
[사형소종출동지:먼 절에서 울리는 종소리 골짜기에 은은히 들린다
[차일봉군음호경:오늘 그대를 만나 빼어난 경치 상찬하지만
[타년상억빈여사:다른 해에 서로 추억할 때는 귀밑 터럭 세어 있으리
印上人:승려. 이름은 석인(釋印)이고, 호는 명경(明鏡)이다.
1464(세조 10)∼1519(중종 14). 조선 전기의 문신. | 개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사호(士浩), 호는 목계(木溪)·동고(東皐). 강우덕(姜友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집의 강숙경(姜叔卿)이고, 아버지는 강인범(姜仁範)이며, 어머니는 호군 여인보(呂仁甫)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83년(성종 14)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486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함으로써 문명을 떨쳤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장류(杖流)되었다가 얼마 뒤 풀려났다. 그뒤 연산군에게 문장과 시로써 아부하여 그 총애를 받고 도승지에 올랐다.
1506년 중종반정을 주동하던 박원종(朴元宗) 등이 죽이려 하였으나, 영의정 유순(柳洵)의 주선으로 반정군에 나가 목숨을 빌고 반정에 가담하여, 그 공으로 병충분의결책익운정국공신(秉忠奮義決策翊運靖國功臣)의 훈호(勳號)를 받고 진천부원군(晉川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뒤 대제학·공조판서를 거쳐 1512년(중종 7) 한성부판윤이 되고, 이어 숭록대부에 올라 우찬성·판중추부사에까지 이르렀다. 시문에 뛰어나 김일손(金馹孫)에 버금갈 정도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명리를 지나치게 탐냈다.
특히 연산군 말년 애희(愛姬)의 죽음을 슬퍼한 왕을 대신하여 궁인애사(宮人哀詞)와 제문을 지은 뒤 사림으로부터 질타의 대상이 되었고, 반정 후에도 이윤(李胤)으로부터 폐조의 행신(倖臣)이라는 탄핵을 받았다. 저서로 『목계일고』가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목계일고(木溪逸稿)』
'♣ 한시(漢詩) 마당 ♣ > - 우리 漢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禪詩의 特徵과 展開樣相 (0) | 2017.04.21 |
---|---|
定遠樓 - 沈守慶 (0) | 2017.04.20 |
傷春- 申從濩(신종호) (0) | 2017.04.16 |
獨木橋 -金時習 (0) | 2017.04.14 |
宿開岩寺 - 權遇 (0) | 2017.04.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