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번째 이야기-꿈은 꿈일 때가 좋더라
1.
74년 군 복무 시절, 피교육생 내무반장 하던 기간 중에 ROTC 초등군사반 소위 한명 앞으로 E여대생들이 무더기로 위문편지를 보내 온 적이 있었다.사연을 알아보니 형님이 E여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어서 제자들한테 위문 편지를 강제해서 빚어진 결과물이었는데 암튼 그중에 마음에 드는 편지 한통씩을 같이 복무하던 후배 4명과 공모(?)하여 슬쩍했다.
2.
나는 그중 이름은 촌스러우나 글씨가 가장 예쁘다고 생각된 법대생 한명을 골라 "글씨가 예쁘니 얼굴도 무지 예쁘겠지"하고 내 맘대로 상상하면서 정성을 들여 편지를 했다.그리고 제대 전 까지 몇번 편지를 주고 받긴 했으나 이내 끊겼다.
당시 그녀와의 현실적 만남을 생각할 만큼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굳이 내가 옆 대학 휴학하고 군복무중이라는 것을 밝히지를 않은 터라 그녀 입장에선 군 복무중인 일개 사병 신분의 나를 단지 글씨가 예쁘다는 이유로 길게 편지를 주고 받을 생각이 있을리 없었을 것이기에 당연한 결과었다.
3.
그런 그녀와 꽤 오랜 기간 현실적 만남없이 편지만을 주고 받는 교제가 이뤄진건 복학해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학교 주소로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부터였다.그녀는 내가 자기 학교 바로 옆에 있는 학교 학생인 걸 알고 너무 놀랐다는 뜻으로 답을 해왔고 이후 내가 은행에 취업을 하기 전까지 쭈욱 이어졌다.
4.
그런 그녀와의 편지 교제는 같은 과 후배들에겐 꽤 화제였었는지 누구의 짓인지는 몰라도 한번은 그녀의 편지가 겉봉이 가위로 곱게 잘려져 있은 적도 있었다.아마도 누군가가 편지 내용이 몹시도 궁금했었던게 아닐까 싶은데 누구 짓인지 심증은 가나 물증은 전혀 없었다.아마도 나에게 관심이 좀 있어 보였던 같은 과 후배 여학생 둘중 한명의 소행이지 싶긴 했는데...^^
5.
당시 그녀는 현실적 만남 의사를 전혀 표시하지 않는 내가 몹시도 궁굼했는지 연극 티켓을 보내오기도 하고, 느낌으론 내가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우리 학교 다니는 여고 동창들을 동원해 알아 보는 것도 같았는데 나로선 전혀 그녀를 만날 생각이 없었다.아니 만날 수가 없었다.
그녀를 현실적으로 만나 만약 내 마음에 드는 모습을 하고 있을 경우 만남을 지속해야 될 텐데 당시의 나에게는 그럴 시간적,물질적 여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6.
그런 그녀와의 현실적 만남을 한건 은행에 취업을 하고 나서였다.
그녀가 워낙 절실히 원해서이기도 했지만 나도 이제는 한번쯤은 현실적으로 만나봐야 되지 않겠냐는 생각에서 였는데 그 첫 만남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편치않다.
7.
이유는 3년여의 기간을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가며 생각해 온 그녀의 모습이 너무도 실망스런 외모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유난히 외모를 따지는 내 성격을 십분 감안하더라도 현실로 나타난 그녀의 모습은 한마디로 너무 못생긴 얼굴에 속했다.체형이나 좀 크면 좋을텐데 나도 큰 편이 아닌데 그녀는 너무 작았다.얼굴도 안 예쁘고 체형도 왜소하고...
8.
너무도 실망한 첫 만남 이후 그동안 그녀에게 쏟은 마음의 정성이 아까워 몇번의 만남을 더 해봤지만 그때마다 실망만 하게 되어 그냥 저절로 멀어져 버리고 말았다.내 마음이 그랬으니 그녀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어떠했는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우선 내가 좋은 다음에야 상대방 마음을 알아보게 되는 법 아닌가?
9.
사랑 고백을 한 연인 사이는 아니라도 적지 않은 기간 서로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가졌던 교감,자극을 생각하면 너무도 허무한 결말이어서 40여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생각해도 안타깝기 그지 없다.그녀가 내가
싫어하는 그런 모습만 아닌 그냥 평범한 모습의 외모만 하고 있었어도 그동안 편지로 들인 공이 아까워 어떡해서든 만남을 이어가려 했을런지 모른다.당연히 그녀가 동의해야 되는 일이긴 했지만...
10.
그녀와의 편지 교제 덕분에 한권의 책이라도 더 읽게 되었고 습작을 하고 있던 때이긴 했지만 아름다운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느라 문장력도 많이 늘었을 것이다.그런 점을 생각하면 그녀와의 편지 교제가 무익하지는 않았으나 들인 마음에 비하면 너무도 허망한 결말이어서 "차라리 현실적으로 안 만나고 그냥 편지 교제만 하다 끝났으면 더 좋았을 텐데"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11.
그녀도 이젠 60이 넘은 할머니가 되어 있을텐데 당시 너무도 실망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자기를 좋다고 딸아 다니는 나하고 같은 학교 다니는 교회 선배가 있다"는 얘기를 하는 걸로 반발 비슷한 걸 한 기억이 나는데 그 자기 좋아한다는 교회 선배와 결혼해 한평생 잘 살아 왔을까?
마음은 착한 듯 싶었는 데 세월이 많이 흐른 뒤인 지금의 마음으로 다시금 그녀를 보면 처음 그녀를 봤을 때의 실망감은 많이 없어져 있지 않을까?
12.
너무 일방적으로 내 생각 위주로 글을 쓰다 보니 당시의 내 행동이 혹 그녀에게 상처를 준 것은 아니었는지 지금까지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생각이 이 글을 쓰는 지금 불현듯 떠오른다.
13.
그녀가 한 평생 잘 살아왔기를 바래본다.
2013. 4.28 일요일 새벽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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