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文學) 마당 ♣/- 우리 현대시

이성부 시인 시 모음

Bawoo 2014. 10. 26. 22:50


산길에서 
                                                                                
이 길을 만든 이들이 누구인지를 나는 안다
이렇게 길을 따라 나를 걷게 하는 그이들이
지금 조릿대밭 눕히며 소리치는 바람이거나
이름 모를 풀꽃들 문득 나를 쳐다보는 수줍음으로 와서
내 가슴 벅차게 하는 까닭을 나는 안다
그러기에 짐승처럼 그이들 옛내음이라도 맡고 싶어
나는 자꾸 집을 떠나고
그때마다 서울을 버리는 일에 신명나지 않았더냐
무엇에 쫓기듯 살아가는 이들도
힘을 다해 비칠거리는 발걸음들도
무엇 하나씩 저마다 다져놓고 사라진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나는 배웠다
그것이 부질없는 되풀이라도
그 부질없음 쌓이고 쌓여져서 마침내 길을 만들고
길 따라 그이들 따라 오르는 일
이리 힘들고 어려워도
왜 내가 지금 주저앉아서는 안되는지를 나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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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가본 산

 

 

내 책장에 꽃혀진 아직 안 읽은 책들을

한 권씩 뽑아 천천히 읽어 가듯이

안 가본 산을 물어 물어 찾아가 오르는 것은

어디 놀라운 풍경이 있는가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떤 아름다운 계곡을 따라 마냥 흘러가고픈 마음 때문이 아니라

 

산길에 무리지어 핀 작은 꽃들 행여 다칠까봐

이리저리 발을 옮겨 딛는 조심스러운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누대 갈참나무 솔가지 흔드는 산바람 소리

또는 그 어떤 향기로운 내음에

내가 문득 새롭게 눈뜨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성깔을 지닌 어떤 바위벼랑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새삼 높은 데서 먼 산줄기 포개져 일렁이는 것을 보며

세상을 다시 보듬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직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사랑의 속살을 찾아서

거기 가지런히 꽂혀져 안 읽은 책들을 차분하게 펼치듯

이렇게 낯선 적요 속으로 들어가 안기는 일이

나에게는 가슴 설레는 공부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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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 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이성부 전 시인
1942년 1월 22일(광주) ~ 2012년 2월 28일 (향년 70세) | 말띠, 물병자리
데뷔:1959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시 '바람' 당선
학력: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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