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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교마상연아체(東郊馬上演雅體)- 곽예(郭預)

Bawoo 2017. 2. 9. 23:11

동교마상연아체(東郊馬上演雅體)동쪽 들판 말위에서 시를 읊다

                                       

                                                                                -곽예(郭預)


信馬尋春事(신마심춘사); 말에게  몸 맡겨 봄 나들이 나가보니

牛兒方力耕(우아방역경); 소는 한창 밭 가느라 애쓰고 있고

鳥鳴天氣暖(조명천기난); 새는 하늘에서 지저귀고 날씨는 따뜻하구나

魚泳浪紋平(어영랑문평); 물고기 헤엄치니 잔물결 일고

野蝶成團戱(야접성단희); 들에는 나비들 무리 지어 날며

沙鷗作隊行(사구작대행); 모래 위 갈매기는 떼 지어 날아가고 있구나

自嫌隨燕雀(자혐수연작); 부끄럽구나 소인배들(연작) 따르다가

不似鷺鷀淸(불사노자청); 해오라기와 가마우지처럼 깨끗하지 못한 것이


演雅體:한시체의 한 종류

春事:① 봄 농사 ② 봄갈이

燕雀:(1)제비 참새 아울러 이르는 .(2)도량 좁은 사람 비유적으로 이르는 .

해오라기(鷺), 가마우지()

                                                  

  [서예 습작]


 

  • 곽예 (선갑(先甲), 郭預)

  • 1232(고종 19)∼1286(충렬왕 12). 고려 후기의 문신. | 개설 본관은 청주(淸州). 초명은 왕부(王府). 자는 선갑(先甲), 호는 연담(蓮潭). 문하평장사 날(埒)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 1255년(고종 42)에 급제해 전주사록(全州司錄)에 임명되었다. 1263년(원종 4) 왜구가 웅신현(熊神縣 :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 물도(勿島)에 침입해 공선(貢船)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잡아가자, 첨사부녹사(詹事府錄事)로서 대관서승(大官署丞) 홍저(洪泞)와 함께 화친첩(和親牒)을 가지고 일본에 가서 도둑질을 금할 것과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을 돌려보내기를 청하였다.

  • 1270년 무신정권의 마지막 집권자 임유무(林惟茂)가 주살되자 내원령(內園令)으로서 중승(中丞) 홍문계(洪文系), 장군 송분(宋玢)과 더불어 왕에게 하례하고 곧 수도를 강화에서 개경으로 옮겼다.

    재능이 있었으나 끌어주는 사람이 없어 승진하지 못하다가, 사관(史館)의 추천으로 예빈주부(禮賓注簿)로서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겸하였다.


  • 충렬왕이 즉위하자 그의 인물됨을 듣고 발탁해 판도정랑 보문서대제 지제고(判圖正郎寶文署待制知制誥)로서 필자적(必闍赤)으로 삼았다.

    그 뒤 국자사업 전법총랑 위위윤 춘궁시강학사(國子司業典法摠郎尉衛尹春宮侍講學士)를 역임하였으며, 우부승지가 되어 소·말의 도살을 금할 것을 건의하였다.


  • 1282년(충렬왕 8) 동지공거(同知貢擧)에 제수되자 전법판서 김서(金㥠)의 직위가 자기보다 높으므로 사양하였다가 마침 김서가 죽었으므로 시험을 주관하였다.

    좌승지 국자감대사성 문한학사(左承旨國子監大司成文翰學士)에 올랐고, 1286년에는 지밀직사사 감찰대부(知密直司事監察大夫)가 더해졌다. 원나라에 성절(聖節)을 하례하고 돌아오던 도중에 55세로 죽었다.


  • 사람됨이 강직하고 소박해 높은 지위에 이르러서도 옛날과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글을 잘 짓고 서법(書法)에도 능해 독특한 서체를 이루었다.

    그가 한원(翰院)에 있을 때에 비가 오면 맨발로 우산을 쓰고 홀로 용화지(龍化池)에 가서 연꽃을 감상하였는데, 후대 사람들이 그 풍치를 높이 샀다고 한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지산집(志山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