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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조기유학 프로젝트]유미유동(留美幼童)

조기유학 프로젝트 '유미유동'(留美幼童) 그때 미국에서는 청나라 학생들이 서양 기술을 배우고 있었다. 열두 살부터 열다섯 살까지 아이들이다. 이름은 '유미유동(留美幼童)'이다. 모두 120명이다. 1860년 2차 아편전쟁 때 북경까지 서양 연합군에 털리고 난 뒤, 청에서는 이홍장 주도로 '양무(洋務)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제도는 그대로 두고(중체·中體) 기술만 수입하면(서용·西用) 부강해진다는 중체서용 논리였다. 1872년 청 정부는 일찌감치 자비로 미국 예일대 유학을 다녀온 용굉(容?)의 상소를 받아들여 청소년 120명을 선발해 미국으로 보냈다.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군사, 철도, 전신 같은 중국 근대화에 필요한 기술 습득이었다. '총명하고 예의 바르고 용모 단정한' 소년 120명이 뽑혔다. 이..

중일전쟁 발발(1937. 7. 7) 이전 주요 사건

중일전쟁 발발(1937. 7. 7) 이전 주요 사건 제1차 초공작전(1930.12.19~1931.1.3) 탕산 사건(1931.2.28) 제2차 초공작전(1931.4.1~1931.5.31) 1차 양광사변(1931.5.27~1932.1.1) 나카무라 사건(1931.6.27) 만보산 사건(1931.7.1) 제3차 초공작전(1931.7.1~1931.9.20) 류탸오후 사건(1931.9.18) 만주사변(1931.9.18~1932.3.1) 3차 장왕합작(1932.1) 마옥산 사건(1932.1.18) 제1차 상하이 사변(1932.1.28~1932.5.5) 송호정전협정(1932.5.5) 제4차 초공작전(1932~1933) 열하사변(1933) 당고정전협정(1933.5.31) 폐량개원(1933.4.5) 제5차 초공작전(1..

[마오쩌둥의 친동생-중화소비에트국가은행의 총재]마오쩌민( 毛泽民, 毛澤民, Máo Zémín)

(1896년 4월 3일 ~ 1943년 9월 27일)은 마오쩌둥의 동생으로 자는 룬롄(潤蓮)이며 후난성 샹탄시 샹탄현 출신이다. 생애 1922년 10월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이전에는 안위안(安源) 탄광 노동자들의 파업 현장에서 노동 운동에 참여했다. 1925년에는 중국 공산당 중앙출판발행부 경리로 임명되었고 1931년에 장시성 루이진시에서 민월공(閩粵贛, 푸젠성-광둥성-장시성) 군구 경제부장으로 취임했다. 마오쩌둥이 주도한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수립 과정에 참여했고 1931년 11월에는 마오쩌둥에 의해 중화소비에트국가은행의 총재로 임명되었다. 1934년 10월에는 홍군이 주도한 장정에 가담했고 1936년 2월에는 중화소비에트 공농민주정부 국민경제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38년 2월에는 신장성 디화시(현재..

[청일전쟁-일본군에게 패하여 자결한 북양함대 제독]정여창(丁汝昌)

정여창丁汝昌 [Ding Ruchang] 정여창(중국어 정체자: 丁汝昌, 병음: Dīng Rǔchāng 딩루창[*], 1836년 11월 18일 ~ 1895년 2월 12일)은 청나라 말기의 군인이다. 원래의 이름은 선달(先達), 자는 우정(禹廷), 호는 차장(次章)이다. 태평천국의 난이 발발하자 처음에는 반란군 편에 참가했지만, 청나라에 전향하여 이홍장 밑에서 일했다. 이후 북양 함대의 제독이 되었고, 청일 전쟁 중에 함대전 패전의 책임을 지고 자결했다. 생애 태평천국 1836년(도광 16년), 안휘성 여강(현 여강현)에서 태어났다. 집이 유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3년 정도 사숙에 다녔을 뿐, 10살 무렵에는 학문의 기회를 잃었다. 1854년(함풍 4년)에 태평천국군이 여강을 점령하자 정여창도 엽운래(葉芸來)..

[중화민국-군벌, 3불 장군,마약왕]장쭝창(张宗昌)

중화민국 안국군 부사령관 중화민국 직로연군 총사령관 정체 張宗昌 간체 张宗昌 한국식 독음 장종창 영문 Zhang Zongchang 자 효곤(效坤) 출생 1881년 2월 13일 청나라 산동성 액현 사망 1932년 9월 3일 중화민국 산동성 제남 국적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학력 녹림대학 마적과(학사장교) 직업 정치가, 군인 종교 유교 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봉천군벌의 맹장으로 2차 직봉전쟁 이후 산동독판이 되어 산동을 지배하였으나 방탕하고 폭력적인 생활 때문에 혼세마왕, '개고기 장군(狗肉將軍)'이라는 비아냥을 들었고 재산이 얼마인지, 부하가 얼마인지, 부인이 얼마인지 모른다 하여 '삼불장군(三不將軍)'이란 별명도 있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81년 산동성 액현 축가촌에서 태어..

[삼국시대(촉한): 4대 재상 중 한 명]장완(蔣琬)

장완 장완(蔣琬, ? ~ 246년)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신료로, 자는 공염(公琰)이며 영릉군 상향현 사람이다. 제갈량(諸葛亮), 비의(費禕), 동윤(董允)과 함께 촉의 사상(四相)으로 꼽힌다. 시호는 공후(恭侯)다.[1] 생애 약관의 나이에 천릉에 사는 외종제 유민(劉敏)과 함께 이름이 알려졌다. 장완은 주서과의 신분을 지니고 유비(劉備)를 따라 촉 땅으로 들어가 광도현의 장이 되었다. 일찍이 유비가 촉나라 땅을 돌아보던 중 광도현을 방문하게 됐는데, 장완이 맡은 집무를 해결하지 않은채, 술에 취해 있는 것을 보고는 매우 노여워하여 장완을 처벌하려고 했다. 그러자 그 당시에는 군사장군으로 있던 제갈량이 유비에게 간청하며 건하였다. "장완은 국가의 그릇이지, 백리를 다스릴 인재가 아닙니다. 그의 정무 ..

[삼국시대(후한 말 혼란기)-조조를 경호하다가 전사한 인물]전위(典韋)

전위(典韋, ? ~ 197년)는 중국 후한 말 조조 휘하의 군인으로 연주 진류군 기오현(己吾縣) 사람이다. 사지에 빠진 조조를 경호하다가 전사하였다. [명성] 양읍(襄邑) 사람 유씨(劉氏)가 수양(睢陽)사람 이영(李永)과 원수가 되었는데, 전위가 복수를 하게 되었다. 이영은 예전에 부춘장(富春長)을 지냈었는데, 준비함이 심히 조심스러웠다. 전위가 수레에 닭과 술을 싣고가, 거짓으로 문후를 여쭙고자 하였다. 문이 열리자 비수를 품고 들어가 이영을 죽이고, 아울러 그 아내를 죽이고는 천천히 문을 나와, 수레에 칼과 창(戟)을 싣고 걸어서 떠났다. 이영의 거처는 시장과 가까웠는데, 시장 전체가 모두 다 놀랐다. 추격하는 자가 수백 명이나 되었지만, 감히 가까이 가지 못했다. 4 ~ 5리를 가다 그 따라오던 자..

[삼국시대(조위)-조방의 두번 째 황후인 장황후의 아버지, 사마소를 제거하려다가 실패하고 멸족된 인물]장집(張緝)

장집(張緝, ? ~ 254년)은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문신으로, 자는 경중(敬仲)이다. 장기의 아들이며, 장황후의 아버지이다. 행적 아버지의 작위를 계승하여 서향후(西鄕侯)가 되었으며, 태화(太和) 연간(227년-233년) 온현령(溫縣令)이 되었다. 기도위(騎都尉) · 상서랑(尙書郞) · 동관태수(東莞太守) 등을 역임하였다. 가평(嘉平) 4년(252년) ,딸이 황제 조방의 황후가 되자 광록대부(光祿大夫) · 위특진(魏特進)이 되었으며, 당시 외척이 지는 관례에 따라 태수직을 물러났다. 장집은 재물욕은 없어도 권력욕은 있었는데, 은퇴하게 되었으므로 염려하며 자주 오(吳)와 촉(蜀)의 사정을 진술하고, 사마사(司馬師)의 물음에 답하고, 제갈각(諸葛恪)이 승리하지만 곧 살해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가평 6년(..

[삼국시대 이전 혼란기(후한 말)-한때 벗이던 조조와의 대결에서 패해 몰락한 인물] 장막(張邈)

장막(張邈, ? ~ 195년)은 중국 후한 말의 정치가로 자는 맹탁(孟卓)이며 연주 동평국 수장현(壽張縣) 사람이다. 재산을 풀어 곤궁한 이를 돕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조조와의 사이도 깊었으나 여러 사정으로 인해 여포를 받아들이고 연주 공방전을 벌이다 몰락하였다. 생애 천하의 명사 젊을 적부터 의협심이 있어 가난하거나 위급한 자들을 구제하는 데에 집안을 아낌없이 기울였다. 이에 재물로 타인을 구한다는 팔주(八廚) 중 한 명으로 이름이 높았으며[1] 많은 선비들이 따랐다. 조조, 원소와도 교우하였다. 공부(公府)에 불려가 고제(高第)로써 기도위를 지냈다. 189년(중평 6년), 진류태수로 승진해 다른 관리들과 함께 동탁 토벌을 모의하였다. 마침 광릉태수로 있던 동생 장초도 와서 이를 상의하였다. 190..

[삼국시대(조위)-위문제 사마염의 외할아버지]왕숙(王肅)

왕숙(王肅, 195년 ~ 256년)은 중국 삼국시대 위(魏)의 학자이자, 정치가이다. 작위는 난릉후. 자는 자옹(子雍). 본관은 동해군 담현이나, 회계(會稽:현재의 저장성)에서 출생하였다. 왕랑(王朗)의 아들이다. 그의 딸인 왕원희는 사마소(司馬昭)에게 시집가서 진(晋)의 무제 사마염(武帝 司馬炎)을 낳았다. 생애 아버지 왕랑이 회계태수를 지냈기에,[1] 왕숙은 그 무렵에 아버지의 임지인 회계에서 태어났다.[2] 왕숙은 관리로서 때때로 상소하여 시사(時事) · 제도(制度)에 대한 견해를 진술하고 정치활동을 행하였으며, 중령장군(中領將軍), 산기상시(散騎常侍-천자에 봉사하는 중요한 고문관)가 되었다. 황초 7년(226년), 조예가 즉위하면서 난릉후에 봉해졌다. 태화 4년(230년)에는 조진이 촉한을 치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