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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조위~진):왕랑의 손녀, 왕숙의 딸, 사마소의 부인, 사마염의 어머니)문명황후(文明皇后)왕원희(王元姫)

문명황후 왕씨(文明皇后 王氏, 217년 ~ 268년)는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 ~ 진나라의의 인물로, 서진의 황태후이다. 왕랑의 손녀이자, 왕숙(王肅)의 딸이다. 사마의의 아들 사마소와 혼인하여 훗날 진나라 황제가 되는 사마염을 낳았다. 이름은 왕원희(王元姫)이며, 시호는 문명황후(文明皇后)이다.[1] 생애 8세 때 시경과 논어를 암송하였고, 이치에 맞는것을 더욱 옳게 여기게 됐으며, 참으로 문장의 뜻에 있어서는 눈으로 한번 보면 반드시 마음속에 담아두곤 하였다. 9세에, 그녀의 어머니인 평양정군 양씨(平陽靖君 羊氏)가 병에 걸리자 그녀는 어머니를 모시며 옷을 갈아입지 않을 정도로 곁에서 쉬지 않고 문병을 하였다. 매번 윗사람을 헤아리며 뜻을 살피고, 알맞은 경우에 행하여, 이로 인해 부모는 집안일을 다스..

[삼국시대-조위의 중신]왕랑(王朗)

왕랑(王朗, ? ~ 228년)은 중국 후한 말기 ~ 조위의 정치가로, 자는 경흥(景興)이며 서주 동해국 담현(淡縣) 사람이다.[1] 본명은 왕엄(王嚴)이었다. 생애 처음에는 (에 따르면) 대장군 하진의 속연이 되었다가 서주로 가서 자사(刺史) 도겸(陶謙)을 섬겼으나, 황제에게 올린 상주문이 높게 평가받아 회계태수(會稽太守)에 임명되었다. 훗날 강동에 손책(孫策)이 진출하였는데, 주변의 호족들을 규합한 왕랑은 제1표적이 되었다. 군의 공조(功曹) 우번(虞翻)은 달아날 것을 진언하였지만, 한(漢)의 신하로서 성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왕랑은 이 주장을 물리쳤다. 처음에는 고릉 땅에서 손책에게 저항하며 강을 건너 싸우는 손책 군을 여러 번 막아냈다. 손책이 손정(孫靜)의 진언을 따라 사독 길로 나와 고천둔을 ..

[삼국시대(후한 말 혼란기)-조조를 제거하려다가 실패한 인물]劉陽

劉陽 생몰년도 미상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의 인물. 왕랑의 가전에 따르면 왕랑이 젊을 때 교제가 있었던 인물로 패국의 유명한 선비였는데, 조조의 자질을 알아보고 조정에 큰 위협이 될 거라 여겼다. 조조를 적대해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기회를 잡지 못했다고 하며,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조조가 삼보의 난에서 헌제를 구출했다가 수도를 허도를 옮기면서 헌제를 옹립해 권력을 잡자 유양이 이미 죽었음에도 그의 아들을 찾기 위해 대대적인 수색 작업을 벌였다고 하며, 조조의 수색 작업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힌 유양의 아들은 도망가려고 했지만 많은 친지나 친구들 중에는 누구 하나 유양의 아들을 숨겨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젊은 시절에 유양과 친분이 있던 왕랑이 자신의 집에 숨겨주면서 조조를 찾아가 인정에 호소했다고 하며, ..

[삼국시대(후한말 혼란기)-원담에 대한 충절로 조조에게 발탁된 인물]왕수(王脩/王修)

왕수(王脩/王修, ? ~ ?)는 중국 후한 말 공융, 원담, 조조 휘하의 정치가로 자는 숙치(叔治)이며 청주 북해국 영릉현(營陵縣) 사람이다. 생애 공융 시절[편집] 7살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어미니는 사일(社日, 봄과 가을에 토지신에게 제사지내는 날)에 죽었는데 다음 해 이웃 마을에서 제사를 지내자 왕수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심히 슬퍼했다. 그 소리가 이웃 마을까지 들려 제사를 멈추었다. 20살에 남양군으로 유학해 장봉(張奉)의 집에 기거하였다. 장봉의 온 집안에 질병이 들자 왕수가 친히 보살폈다. 초평 연간에 북해국상 공융의 주부(主簿)가 되어 고밀현령(高密縣令)을 대리하였다[守]. 고밀에 손씨(孫氏) 성을 가진 호협한 자가 있었는데 그 문객들이 수차례 범법하였다. 어느 날 민간의 강도가 손씨한테로 ..

[삼국시대 이전 혼란기(후한 말)-황제 추대된 것도 거절할 정도로 강직했으나 공손찬과 대립했다가 살해당한 인물]유우(劉虞)

유우(劉虞, ? ~ 193년)는 중국 후한 말의 관료로 자는 백안(伯安)이며 서주 동해국 담현(郯縣) 사람이다. 명제의 이복형인 동해공왕의 5세손[1]으로 조부 유가가 광록훈을 지냈다. 백성들의 신망을 크게 얻었으며 원소로부터 황제로 추대되기도 했는데 본인이 완강히 거절하였다. 이민족 정책을 놓고 공손찬과 대립하다가 살해당했다. 장거, 장순의 난을 평정 이미 황제와 촌수가 멀었으므로 현의 하급관리로 일했으나, 청렴하고 학식이 빼어났으므로 군(郡)으로 불려와 군리가 되었고, 군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효렴으로 천거되며 낭(郞)이 되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승진을 거듭한 끝에 유주자사에 이르렀는데, 민정에 능하고 온후하고 사려가 깊었으며 명성과 지위에 의지해 자신을 높이지 않고 항상 겸손하며 검약한 태도를..

[삼국시대 이전 혼란기(후한 말)-조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도망하다 잡혀 처형된 뒤 기림을 받은 인물]저수(沮授)

저수(沮授, ? ~ 200년)는 후한 말기의 관료로, 기주 광평군 사람이다. 기주목 원소를 섬겨 세력 구축에 크게 공헌하였으나, 미움을 사 좌천되었다. 생애 저수(沮授) 후한 ? ~ 건안 5년(200년) 기주 광평군 기주별가(冀州別駕) → 현령(縣令) → 현령(縣令) → 기주별가(冀州別駕) · 기도위(騎都尉)〔한복〕 → 감군(監軍) · 분위장군(奮威將軍)[1]〔원소〕 → 도독(都督)〔원소〕 한복 → 원소 젊을 때부터 큰 뜻을 품었고, 권모술수에 뛰어났다. 처음에는 기주별가(冀州別駕)를 지냈고, 이후 두 현[2] 에서 현령(縣令)을 지냈다. 훗날 기주목(冀州牧) 한복(韓馥)의 휘하에서 별가(別駕)·기도위(騎都尉)로써 그를 섬겼다.[3] 초평(初平) 2년(191), 한복이 원소(袁紹)에게 기주를 양도하려고 ..

[삼국시대 이전 혼란기(후한 말)-원소 부자 휘하에 있으면서 절의를 지켜 조조에게 출사하지 않은 인물]한형(韓珩)

한형(韓珩, ? ~ ?)은 중국 후한 말 원희 휘하의 정치가로 자는 자패(子佩)이며 유주 대군 사람이다. 원소의 아들들이 패망해가는데도 충절을 지켜 조조에게 출사하지 않았다. [ 생애] 청렴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기 때문에 형과 누이를 부모처럼 섬겨 문중에서 효자로 이름이 높았다. 유주자사 원희 밑에서 별가(別駕)를 지냈다. 205년(건안 10년) 조조가 원담을 처치하고 기주를 완전히 정복하자 초촉과 장남은 원희를 배반하여 원희와 그 동생 원상을 공격하였다. 원희와 원상은 요서오환에게로 달아났고, 초촉은 유주자사라 칭하며 유주의 모든 관리들이 조조에게 투항할 것을 백마의 피를 마셔 맹세하게 했다. 명령을 어기는 자는 목을 베겠다고 으름장도 놓으니 반항하는 이가 없었다. 한형은 자신의 ..

[삼국시대(동오)-하인에게 살해된 손견의 셋째 아들]손익(孫翊)

손익(孫翊, 184년 ~ 204년)은 중국 후한 말기의 장수로 자는 숙필(叔弼)이며, 손견(孫堅)의 셋째 아들이다. 용감하고 날랜 모습이 맏형 손책(孫策)과 비슷했다고 전한다. 생애 오군태수 주치(朱治)가 효렴으로 천거했다. 《전략》에 따르면, 손책이 죽음에 임하자 장소(張昭) 등이 손익으로 뒤를 잇기를 주장했으나, 손책은 손권(孫權)에게 인수를 건네 자신의 뒤를 잇게 했다. 건안 8년(203년) 단양(丹陽) 태수 겸 편장군(偏將軍)이 되었다. 손권이 옛 오군태수 성헌(盛憲)을 죽이자 성헌이 효렴으로 천거한 규람(嬀覽)과 대운(戴員)은 산 속으로 숨었는데, 손익은 단양태수가 되자 이들을 불러 군승으로 삼았다. 건안 9년(204년), 규람과 대운의 꼬드김을 받은 측근 변홍(邊鴻)에게 암살당했다. 그러나 변..

[삼국시대(동오)]-궁녀들에게 살해당한 손권의 정실]반부인(潘夫人)

潘夫人 (?~252년) 1. 개요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여성. 손권의 황후, 손량의 어머니. 회계군 구장현 사람. 통칭은 반부인(潘夫人), 본명은 반숙(潘淑).[1] 사부인→서부인→보연사를 잇는 손권의 네 번째 정실인데, 보연사는 생전에는 황후에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반부인만이 유일한 손권의 황후이다. 2. 생애 원래 죄를 지어 사형당한 하급 관리의 딸로 그녀도 연좌제로 언니와 함께 실 잣는 방에서 일하게 되는데, 그런 그녀를 보고 손권이 후궁으로 삼았다. 거기다가 결국 승은을 입어 용머리를 앞치마로 받는 태몽을 꾸고 손량을 낳았다. 그런데 250년에 이궁의 변에서 어부지리스럽게 아들 손량이 태자로 세워지자 그는 손권에게 언니를 출가시킬 것을 권해 손권이 허락해서 언니는 담소라는 사람한테 시집간다. ..

[삼국시대(동오)-손권의 총신 "여일"에게 고발당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시의(是儀

시의(是儀, ? ~ ?)는 중국 후한 말에서 삼국시대 오나라 때의 문관으로, 자는 자우(子羽)이며, 북해군 영릉현 사람이다. 본래 이름은 씨의(氏儀)였다. 행적 처음에는 현의 관리였는데, 당시 현의 상이었던 공융(孔隆)이 씨의에게 “ ‘씨(氏)’자는 ‘민(民)’의 위쪽 부분이 없는 것이므로 네놈은 머리가 없구나! 차라리 성을 ‘시(是)’로 바꾸는 것이 낫겠다. ” 라고 하자, 씨의는 그 말대로 성을 갈아 ‘시의’가 되었다. 이후 유요에게 의탁해 강동으로 전란을 피해 피신했으며, 손책의 군대에게 유요의 군대가 패하자 회계로 이주한다. 손권이 손책의 뒤를 이어 문필의 우수함을 이유로 시의를 초빙하자 시의는 손권이 있는 곳으로 도착해 신임을 받아 기밀사항을 전문적으로 처리해 기도위로 임명되었다. 여몽이 관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