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歷史) 마당 ♣/- 인물, 단체 181

[대한제국기- 덕유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의병들의 무덤 및 의병장]칠연의총(七淵義塚), 신명선(申明善)

칠연의총 위치, 문화재 지정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칠연로 608 (안성면) [칠연의총] 전라북도 기념물 제27호(1976.04.02 지정) 칠연의총은 한 말에 일본군과 싸우다 목숨을 잃은 의병장 신명선(申明善)과 그의 부하들이 잠든 곳이다. 시위대 소속 군인이었던 신명선은 순종 융희 원년(1907) 정미칠조약이 체결되어 우리의 군대가 해산 당하자 무주에 들어와 덕유산을 거점으로 의병을 모집, 무주·장수·순창·용담·거창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우면서 많은 공을 세웠다. 융희 2년(1908) 4월 신명선은, 계속된 전투로 인해 피로에 지친 부하들과 함께 이곳 칠연계곡 송정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가 일본군에게 기습을 당하였다. 이에 마지막까지 목숨을 걸고 싸웠으나, 숫적인 열세로 150여 명의 대원과 함께 장렬..

[내가 모르고 있었던 항일 독립운동가들(1)]최운산(崔雲山) 외

최운산 - 나무위키2020.12.22.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최운산 崔雲山 출생 1885년 12월 7일 함경북도 온성군 영충면 북창평동 사망 1945년 7월 5일 평안남도 평양부 본관 진산 최씨 본명 최명길(崔明吉) 이명 최풍(崔豊), 최만익(崔萬益), 최빈... namu.wiki/w/최운산 나무위키 ----------------------------------------------------- 최진동 - 나무위키2020.12.21. 성명 최진동(崔振東, 崔鎭東) 본명 최명록(崔明祿) 아명 최희(崔熹) 이명 최명록(崔明錄)·최희(崔喜) 본관 진산 최씨# 생몰 1882년 7월 17일 ~ 1941년 11월 25일 출생지 함경북도 온성군 영충면 북창평동... namu.wiki/w/최진동 나무위키 -------..

[고종을 독살하려고 한 인물]김홍륙(金鴻陸)

김홍륙(金鴻陸)(미상~1898(고종 35)한말의 역관. 천민출신이었으나 블라디보스토크를 내왕하면서 러시아어를 익혀 역관으로 특채되었다. 1894년(고종 31)과 1895년 이범진(李範晉)이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조약을 체결할 때 통역관으로 활약했다. 1895년 임최수(林最洙)·안경수 등과 모의하여 친일정권에 포위된 고종을 대궐 밖으로 빼내려는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1896년에는 이범진·이완용(李完用) 등 친러파와 연결하여 비서원승으로 아관파천에 협조했다. 아관파천 후에는 고종과 베베르 사이의 통역을 담당했다. 윤용선(尹容善) 내각에서 학부협판(學部協瓣)이 되었으나, 1898년 친러파의 몰락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고종의 총애를 받고 궁궐을 출입하면서 개화파에 반대해서 독립..

[병자호란 관련-삼전도 비문을 쓴 인물]이경석(李景奭)

이경석(李景奭, 1595년 12월 18일(음력 11월 18일) ~ 1671년 10월 26일(음력 9월 24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작가, 성리학자이자 서예가로, 자는 상보(尙輔), 호는 백헌(白軒)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시호는 문충(文忠), 충청도 제천 출신이다. 송시열을 발탁하여 천거하였으나, 후일 그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623년의 알성문과와 1626년의 중시문과에 급제하여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1637년 12월 당시 도승지 겸 예문관 제학으로 삼전도비문을 짓는다.[1][2] 인조 반정 공신들의 전횡에 맞서 산림학자들을 적극 천거하여 등용하게 했다. 1628년(인조 5) 9월 17일에는 소무원종공신 1등(昭武元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글을 잘 지었고, 삼전도비외 여러 작품을 남겼다. ..

조선조 청백리 218인

조선조 청백리 218인 태조조 5인 태종조 8인 세종조 15인 세조조 7인 성종조 15인 중종조 45인 명종조 45인 선조조 23인 인조조 13인 숙종조 22인경종조 6인 영조조 9인 정조조 2인 순조조 15인 1 참찬 안성 2 찬성사 우현보 3 제학 류구 4 고려주서 길재 5 고려장령 서견 6 절도사 경의 7 참의 이지직 8 대사성 김약항 9 관찰사 이백지 10 참찬 최유경 11 좌의정 이원 12 대사헌 박서생 13 판돈녕 최사의 14 판윤 정척 15 부제학 최만리 16 영의정 황희 17 영의정 류관 18 좌의정 맹사성 19 좌참찬 류겸 20 익평군 이석근 21 주부 민불탐 22 참의 홍계방 23 승지 박팽년 24 관찰사 이정보 25 판관 이지 26 좌찬성 황효원 27 이조판서 류염 28 장령 김장 2..

[을사보호조약 체결에 분노하여 순절한 인물]송병선(宋秉璿)

송병선(宋秉璿) 자 화옥(華玉) 호 동방일사(東方一士), 연재(淵齋) 시호 문충(文忠) 생몰: 1836년 8월 24일 ~ 1906년 1월 24일 출생지: 충청남도 회덕현 성남리 (현 대전광역시 동구 성남동 44-27) 본관: 은진 송씨[1] 매장지: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유학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송병선은 1836년 8월 24일 충청남도 회덕현 성남리(현 대전광역시 동구 성남동)에서 아버지 송면수(宋勉洙)와 어머니 완산 이씨 사이에 장자로 태어났다. 그는 송시열의 9대손으로, 송시열 이후 권상하(權尙夏), 한원진(韓元震)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를 계승했다. 송병선은 9살 때부터 백부 송달수(宋達洙)에게..

[을사보호 조약 체결에 항의하여 자결한 인물]조병세(趙秉世)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趙秉世 출생 1827년 6월 2일 한성부 회동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1가·회현동2가·충무로1가·남대문로3가) 사망 1905년 12월 1일 한성부 본관 양주 조씨 자 / 호 치현(穉顯) / 산재(山齊)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1] 상훈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이용직이 그의 사위이며, 한진그룹 조중훈의 조부 조병규(趙秉圭)는 그의 8촌이다. 2. 생애[편집] 2.1. 관직 경력[편집] 조병세는 1827년 6월 2일 한성부 회동에서 홍천현감을 역임한 조유순(趙有淳)과 대구 서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6대조는 노론 4대신 중 한 사람으로 손꼽혔던 조태채이며, 5대조 조관빈(趙觀彬)은 관중추부사와 홍문..

[일제 강점기- 창씨 개명을 거부하고 자결한 인물]설진영(薛鎭永)

설진영(薛鎭永, 1869년 ~ 1940년)은 구한말의 학자이자 의병이다. 본관은 순창이며 초명은 설진삼(薛鎭三), 자는 도홍(道弘), 호는 남파(南坡), 율재(栗齋)이다. 1895년(고종 32년)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기우만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장성ㆍ나주 등지에서 왜병과 싸웠다. 1940년 일제가 조선 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이를 거부하여 맹세코 성을 고치지 않겠다는 절명시(絶命詩) 2절과 유서를 남기고 우물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위키백과] ----------------------------------------------------------------- 개설 본관은 순창(淳昌). 초명은 설진삼(薛鎭三). 자는 도홍(道弘). 호는 남파(南坡) 또는 율재(栗齋). 아버지는 통정(..

[일제가 창씨 개명을 강요하자 자결로 항의한 인물]유건영(柳健永)

유건영(柳健永)[1883(고종 20년)~1940] 개설 본관은 문화(文化). 호는 석전(石田). 전라남도 곡성 출신. 아버지는 유봉묵(柳琫默)이다. 농촌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약관의 나이에 거유(巨儒) 최익현(崔益鉉)과 기우만(奇宇萬)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생애 및 활동사항 그 때 위정척사사상과 구국을 위하여 사생취의(捨生取義)하는 대의(大義)의 도를 배워 망해가는 조국을 건지고자 결심하게 되었다. 최익현이 의거의 기치를 올리고 순창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을 전개하자 이에 입진하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의진이 패배하여 최익현과 임병찬(林炳瓚) 등이 대마도(對馬島)로 압송되고 의진이 해산되었다. 시세가 의병운동 전개에 불리함을 깨닫고 농촌에 들어가 일제의 삼엄한 감시하에서도 청년자제들을 교육..

[이승만 정권기 주일대표부 공사]유태하(柳泰夏)

유태하(柳泰夏)는 대한민국의 전 외교관이다. 생애 일제 강점기 내무성에서 일한 적이 있다. 기시 노부스케의 측근인 야쓰기 가즈오와 친했다.[1] 1958년 10월부터 1960년 4월까지 제8, 9대 주일 대표부 공사를 지냈다. 당시 최규하가 유태하의 밑에서 참사관으로 일했다. 기타 유태하는 주일 공사 시절 재일동포를 상대로 비자 장사 등 비리를 저지르다 재일교포 사회에서 추방운동의 대상이 됐다. 그는 4·19 혁명 직후 직위가 해제됐으나 본국 소환에 불응하다 5·16 쿠데타 이후 처벌됐다.[2] 당시 유태하 추방 운동을 벌인 이 중에는 조용수도 포함됐다.[3] 1961년 6월 24일 본국으로 소환된 뒤 구속됐다.[4][5] 1960년 4월 26일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할 때쯤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