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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순천 양민학살을 주도하고 거창 양민학살을 은폐한 인물]김종원[金宗元]

[namu.wiki/w/김종원 나무위키] [상세 해설은 위 나무위키를 보세요.] 김종원[金宗元](1922~1964) 1922년 경상북도 경산에서 태어났다. 일본 하사관 출신으로 일본식 이름은 금산종원(金山宗元)이다. [활동 사항] 김종원은 경상남도 마산 주둔 5연대 1대대장으로서 1948년 10월 여순 사건을 진압하였다. 그는 마산에서 창설된 16연대 부연대장을 지냈다. 1949년 11월에 부산에 주둔했던 23연대 연대장을 역임한 후 3권을 행사하는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民事部長)에 올랐다. 그때 나이 28세였다. 1950년 10월경 경상남도 김해군 진영 국민보도연맹원 학살 사건 관련자들이 부산 군사 재판에서 사형과 징역 10년형 등이 선고되었을 때, 3000만 원을 수뢰하고 그들을 석방시켰다고 전한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권오설[權五卨]

권오설[權五卨]1897(고종 34)~1930 [상세 해설 자료 보기] 권오설 - 나무위키 2020.11.16. [1] 성명 권오설(權五卨) 이명 박철희(朴喆熙, 朴哲熙)·김삼수(金三洙) 홍일헌(洪一憲)·권일(權一)·김형신(金亨信) 권부덕(權富德)·권형신(權亨信) 호 오서(五敍)·막난(莫難) 본관 안동 권씨[2] 생몰 1897... namu.wiki/w/권오설 나무위키 ----------------------------------------------------- 일제강점기 제1차조선공산당검거사건(신의주사건) 등과 관련된 사회주의운동가. 독립운동가.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1897년(고종 35) 안동권씨 동성 마을인 풍천면 가곡리에서 권술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일이라고 불리는 이 마을은 15세기 초 ..

[담헌 홍대용 선생의 스승]김원행(金元行)

김원행의 초상화 김원행(金元行, 1703년 2월 14일(음력 1702년 12월 29일)~ 1772년 8월 5일(음력 7월 7일))은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 몽와 김창집의 손자이고 죽취 김제겸의 셋째 아들이다. 5촌 종숙인 김숭겸의 양자로 입적했다. 이재의 제자였으며, 담헌 홍대용의 스승이다. 호는 미호(渼湖)이고 본관은 (신)안동이다. 생애 경종 초기(1722년~1723년)에 발생한 신임옥사로 조부 김창집과 생부 김제겸이 유배되었다가 처형되었고, 친형 김성행과 친아우 김탄행이 경종의 독살을 꾀한 죄목으로 처형, 그 외에도 일족이 처형되거나 유배되는 등 멸문의 고비를 겪었다. 이후 영조가 즉위하여 가문이 다시 크게 부흥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시골에 은거하며 성리학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 저술 활동에..

[조광조의 시신을 수습, 매장한 인물]양팽손(梁彭孫)

양팽손(梁彭孫, 1488년(성종 19년) ~ 1545년(인종 1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화가이다.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대춘(大春), 호는 학포(學圃)이다. 1510년(중종 5)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고, 1516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했다. 현량과(賢良科)에 발탁되어 정언(正言)·전랑·수찬(修撰)·교리(校理) 등의 관직을 역임했으며,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하기도 하였다. 정언으로 재직할 때 이성언(李誠言)을 탄핵한 일로 인해 대신들의 의계(議啓)로써 직책이 갈렸지만, 조광조·김정(金淨) 등 신진 사류들로부터는 언론을 보호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1519년 10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김정 등을 위해 소두(疏頭)로서 항소하였다. 이 일로 인..

[안동 권씨의 시조]권행(權幸)

권행(權幸, 생몰년 미상)은 고려(高麗)의 공신(公申)이자 안동 권씨(安東 權氏)의 시조이다. 고려사(高麗史)에는 흔행(昕幸)으로 기록되어 있다.[1] 생애 930년 고려 태조(高麗 太祖 13년)에 고창군(古昌郡)에서 왕건(王建)이 후백제왕(後百濟王) 견훤(甄萱)과 전투를 벌였을 때 고을 사람 김선평(金宣平) 장길(張吉)과 함께 태조 왕건(太祖 王建)을 도와 전공을 세우면서 대상(大相)으로 임명되었다. 각주 ↑ 고려사 卷八十二 志 卷第三十六 ↑ 고려사 권57 지 권제11 ---------------------------------------------------------------------------- 안동 권씨의 시조로 후삼국시대 및 고려시대의 인물이다. 원래 신라 왕실의 후예였으며 본명은 김행(金..

[퇴계 제자 중 도산서원에 배향된 유일한 인물]조목(趙穆)

조목(趙穆)1524(중종 19) ~1606(선조 39) 본관은 횡성. 자는 사경, 호는 월천·동고. 아버지는 대춘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2년(명종 7)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대과를 포기하고 경전 연구와 수양에만 전념했다. 그뒤 동몽교관·공릉참봉·집경전참봉·종부시주부·공조좌랑 등에 임명되었으나 이내 사직했다. 1576년 봉화현감으로 잠시 봉직하며 교육진흥에 힘썼으며, 1594년에는 군자감주부로서 일본과의 강화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뒤 장악원정·사재감정·공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했다. 일생 동안 이황을 가까이에서 모셨으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몰두하여 대학자로 존경을 받았다. 경학에 능통했으며, 이기에 대한 사변적 분석을 지양하고 인심도심을 중심으로 하는 심학의 체인..

[정유재란-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 사망 후 대신 지휘했다고 알려진 인물]이문욱(李文彧) 혹은 손문욱(孫文彧)

손문욱(孫文彧):생몰년 미상 조선시대 부장, 만호, 첨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무신. 생애 및 활동사항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 왜군의 포로가 되어 오랫동안 일본에 억류, 돌아올 때 일본 사정을 자세히 탐지해와 당면한 군사·외교 등의 전략상에 기여하였다. 1598년(선조 31) 노량해전 당시 이순신(李舜臣) 휘하에 참전, 이순신이 전사하자 임기응변으로 그의 죽음을 비밀에 붙인 다음 자신이 직접 갑판 위에 올라가 북을 치며 평상시와 다름없이 군사들을 지휘, 독전(督戰)함으로써 마침내 승전할 수 있게 하였다. 1604년 승장(僧將) 유정(惟政)과 함께 일본에 들어가 임진왜란의 사태수습에 공을 세우고 조선인 포로 3,000여 명을 이끌고 돌아온 뒤, 2년 뒤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에 파견되어 전란의 뒤처리를 위..

[조선 후기 -우리나라 최초의 필리핀어 통역사]문순득[文順得]

文順得(1777년 ~ 1847년). 조선 후기 신안군 우이도(牛耳島)에 살면서 일대에서 홍어를 거래했던 어물 장수. 평범한 일개 백성이던 문순득이 조선왕조실록에 이름 석 자를 남긴 이유는 파란만장한 삶 때문이었다. 2. 생애 2.1. 1차 표류 1801년 12월, 24살의 청년 문순득은 작은 아버지와 마을 주민 6명을 따라 흑산도에서 홍어를 사기 위해 태사도(太砂島)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난다. 바다에서 표류하던 이들은 기적처럼 살아 1802년 1월 유구국(琉球國)에 표착한다. 다행히 현지인들은 표류자들을 잘 보살펴주었고, 문순득 일행은 그곳에서 매일 쌀과 채소를 받고 하루 넘어 돼지고기를 제공받았으며, 병이 들면 의원이 와서 진찰해주는 등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8개월 동안 유구국에서 생활한..

[조선 전기-스스로 목숨을 끊은 양영대군의 3남]서산군 이혜(瑞山君 李譿

서산군 이혜 묘소 (왼쪽이 서산군, 오른쪽은 군부인 김씨 묘소 서산군 이혜(瑞山君 李譿, ? - 1451년 4월 10일)은 조선시대 전기의 왕족으로 태종의 손자이며,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적 3남이다. 세종대왕의 조카이다. 정효전 등과 기생을 놓고 다투었다가 탄핵을 받고 파직된 바 있고, 이름은 혜(譿),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그 뒤 음주 후 구타, 살인을 했고 몰래 탈출하는 등의 물의를 빚었는데 실록에서는 이혜가 망가진 원인을 사랑했던 첩을 아버지에게 빼앗기고 난 후에 울화병이 생겼다 한다. 1451년(문종 1) 유배지에서 자결 시도를 하였고 이틀 뒤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생애 초반 조선전기의 왕족으로 본관은 전주이씨(全州李氏), 휘는 혜(譿)이다. 태종의 손자이며, 세종, 효령대군 이보, 성녕대..

[조선 초기:환관 출신 경복궁 설계자]김사행[金師幸]

김사행[金師幸]?~1398년(태조 7) 조선전기 겸판사헌부사, 판경흥부사 동판도평의사사 등을 역임한 환관. 생애 및 활동사항 초명은 김광대(金廣大).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판내부사(判內府事)에 이르렀으며, 1357년(공민왕 6) 왕의 뜻을 좇아 정릉영전(正陵影殿)의 대역사를 일으켜 많은 재력을 소모하였다. 1374년 9월에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선왕 때의 대역사를 일으킨 죄로 익주의 관노가 되고 가산이 몰수되었으나 곧 풀려나왔다. 1391년(공양왕 3)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가 되어 경연에 참석하려는 왕에게 경연에 하루 참석하지 않아도 정사에 해로울 것이 없다 하여, 나가지 못하게 하고 불법을 강론하여 이를 믿게 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이듬해에 태조의 명을 따라 팔각전을 보수하였으며, 이 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