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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 처를 비롯 5명이 죽고 아들 세 명이 납치되는 비극을 겪은 문신]이성구[李聖求]

이성구[李聖求] 출생 1584(선조 17) 사망1644(인조 22) 국적 조선, 한국 목차펼치기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이(子異), 호는 분사(汾沙). 아버지는 〈지봉유설 芝峯類說〉을 지은 수광이다. 1603년(선조 36) 진사가 되었고, 1608년(광해군 즉위)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광해군 때 검열·감찰·예조..

[인조 반정으로 처형된 대북파 중심 인물, 최명길과 급제 동기] 한찬남[韓纘男]

한찬남[韓纘男](1560년 ~ 1623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경서(景緖). 한탁(韓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수성(韓守性)이고, 아버지는 한기(韓箕)이며, 어머니는 유보정(柳寶鼎)의 딸이다.조선 중기,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경서, 이이첨의 측근이었으며 광해군 때 형조판서를 지냈다. 이이첨의 명을 받아서 계축옥사 당시 영창대군 축출에 관여했고 그 이후 인목대비 폐모론에도 깊숙이 관여하는 등 대북파 권력의 핵심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잃고 처형되었다. 생애선조 말기인 160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607년에 성균관박사가 되면서 관직으로 진출을 했다. 이후 광해군이 즉위하자 사간원정언이 되어서 대북 파벌의 일원으로써 유영경 일파를 축출하는 데 가담했으며 임해군의 옥사에도 앞장..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의 합병 과정에서 맺은 조약과 한국인 협조자·친일파[위키백과]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이 합병 과정에서 맺은 조약과 한국인 협조자·친일파제2차 한일 협약(을사조약)을사오적 :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제3차 한일 협약(한일신협약)정미칠적 : 이완용 송병준 이병무 고영희 조중응 이재곤 임선준한일 병합 조약경술국적 : 이완용 윤덕영 ..

[일제 강점기, 미군정기의 사회주의 운동가]박종근

박종근(1920년 ~ 1952년 2월 17일)은 일제 강점기와 미군정 시기의 사회주의 운동가이며 한국 전쟁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군인으로 참전했다. 생애 경상북도 의성군의 명문가 출신이다. 아버지 박영교는 대동청년단 간부를 지낸 우익 진영의 거물로 대한민국 국회의원도 역임한 정치..

[임진왜란 관련- 다대포 전투에서 순절한 장군] 尹興信( ? ~ 1592년)

尹興信 (? ~ 1592년) 조선 중기의 무관으로 임진왜란 발발 당시 다대포[1] 첨사였다. 본관은 파평 윤씨로 중종 시절 권신으로 알려진 윤임[2]의 다섯째 아들이다[3]. 아버지가 을사사화로 숙청될 당시에는 나이가 어려 죽음을 피한 대신에 신분이 노비로 떨어졌지만 선조에 의해 윤임의 명예..

[한국전쟁기 미군에 투항한 북한 군인]리학구(李學九)

李學九 1922년(?) ~ 1963년 6.25 전쟁 당시 남침을 감행한 북한군 부대 중 하나였던 13사단의 참모장이였다[1]. 계급은 총좌[2]. 13사단은 6.25전쟁 초반에 한국군과 미군을 밀어붙이며 낙동강 전선까지 진격했으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하여 부대가 고립되었다. 이 때 리학구는 자신이 모시던 사단장인 홍용진(洪鏞鎭) 소장과 후퇴하네 마네 하면서 옥신각신했다. 리학구는 조금이라도 빨리 후퇴해서 병력이라도 살려보자는 반면, 홍용진은 결사항전으로 버티자고 해서 두 사람은 심하게 말다툼을 했다. 결국 리학구는 홍용진을 자신의 권총으로 쏴 팔에 부상을 입히고 탈출하여 1950년 9월 21일 오전 다부동 남쪽 4km 지점에 있는 삼산동 부근 길가에서 자고 있던 미 제1기병사단 제8기병연대 소속 병사를 ..

[공산주의 항일운동가 겸 북한 군인] 리권무(李權武)

리권무(李權武)생애 1914년 ~ 1986년? 출생지 만주 국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다른 이름 이건무(리건무·李健武) 복무 팔로군 조선의용군 조선인민군 최종 계급 조선인민군 육군 상장 지휘 조선인민군 제4사단 조선인민군 제1군단 주요 참전 한국 전쟁 서훈 내역 제1급 국기훈장 리권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