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歷史) 마당 ♣ 1457

[2차대전시 3대 전차장 중 1인]오토 카리우스(Otto Carius)

곡엽 기사십자 철십자장 서훈 기념으로 찍은 오토 카리우스 중위의 모습 오토 카리우스(Otto Carius, 1922년 5월 27일 ~ 2015년 1월 24일)는 독일 국방군 육군의 기갑사단 소속 전차장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때 적 전차 150대 이상을 격파한 전차 에이스 지휘관이다.[1] 혁혁한 전공으로, 전장에서 대단한 용기를 발휘한 자 또는 훌륭한 군사적 지도력을 발휘한 자에게 수여되는 곡엽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서훈받았다. 카리우스는 두 번 입대를 지원했으나, 체중 미달로 두 번 다 탈락했다. 우여곡절 끝에 1940년 5월에 겨우 입대하여 제 104 보병보충대대에 배치되었다. 훈련 과정에서 카리우스는 기갑병과를 지망했다. 홀슈타인의 푸틀로스에서 제7기갑보충대대 소속이 되어 기갑전의 기초를 학습했다...

[소련 원수]세묜 콘스탄티노비치 티모셴코

티모셴코의 사진 (1940년) 세묜 콘스탄티노비치 티모셴코(러시아어: Семён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Тимошенко, Semën Konstantinovič Timošenko; 1895년 2월 6일 – 1970년 3월 31일)는 소련의 군인이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오데사 근방의 빈농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 제국에 징집되어 기병으로 서부전선에서 싸웠다. 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나자 1918년 붉은 군대에 가담하였고, 1919년에는 볼셰비키당에 입당했다. 러시아 내전 때 그는 여러 전선에서 싸웠는데, 차리친 전투에서 스탈린과 친교를 맺게 되었다. 1920-1921년에는 세묜 부됸니 휘하의 제1기병군에서 근무해서 소련-폴란드 전쟁에도 참전했다.스탈린이 ..

[스탈린 대숙청 때 숙청당한 장군]미하일 니콜라예비치 투하쳅스키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투하쳅스키(Михаи́л Никола́евич Тухаче́вский, 폴란드어: Michał Tuchaczewski, 1893년 2월 16일 ~ 1937년 6월 12일)는 소련의 군인이다. 소련군의 총참모장 (1925~1928)을 역임했고 계급은 원수였다. 그는 1930년대 스탈린의 대숙청에 희생된 가장 유능한 군인 중 한 명이다. 생애[편집] 투하쳅스키는 폴란드 출신의 귀족 태생으로, 현재의 스몰렌스크 근방의 알렉산드로프스코예의 집안 영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알렉산드로프스코예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1914년 제정러시아의 근위부대 중위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그는 전투에서 용맹을 떨쳐 몇 개의 훈장을 받았으나 1915년 독일군에게 포로가 되었고, 포로수용소에서 훗날 프랑스 대..

[번의 개혁을 주도하다 암살당한 인물]요시다 도요(吉田東洋)

요시다 도요 요시다 도요(일본어: 吉田東洋, 1816년 ~ 1862년 음력 4월 8일)는 도사 번의 번사였다. 그는 한때 파면되어 은거를 당했지만, 도사 번의 참정(参政)으로 복귀해 문벌 타파, 식산 흥업, 군제 개편, 개국 무역 등 부국 강병을 목적으로 한 여러 혁신적인 개혁을 수행하였다. 이는 도사 번에 적지않은 동향을 주었으나, 보수세력과 존왕양이(尊王攘夷)론자들로 결성된 집단인 도사 근왕당(土佐勤王党)의 가치관과 맞지 않아 이들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고, 결국 1862년 음력 4월 8일일 도사 근왕당의 나스 신고(那須信吾), 다카미 야이치(高見弥市), 야스오카 가스케(安岡嘉助)에게 암살당했다. [위키백과] [같이 보기] 도사 근왕당(일본어: 土佐勤王党)은 막말에 도사 번에서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

[공산중국 10대 원수 중 1인]천이( 陈毅, 陳毅, Chén Y)

천이 천이(중국어 간체자: 陈毅, 정체자: 陳毅, 병음: Chén Yì, 진의, 1901년 8월 26일 ~ 1972년 6월 6일)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가, 군인이다. 외교관과 시인으로서도 유명하다. 자는 중홍(仲弘). 중국10대원수 중의 한 사람이다. 생애 쓰촨 성 러즈 현의 중산층 지식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6년 청두 갑종공업학교에서 공부하고 1919년, 덩샤오핑과 저우언라이와 마찬가지로 일하며 공부하는 "근공검학" 프로그램에 의해 프랑스에 유학하였다. 1921년 중국유학생을 대상으로 한 학생운동을 이끌었다는 이유로 중국에 강제 송환되었고, 1923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활동 1927년 우한 중앙군사정치학교의 중국공산당 위원회의 서기가 되었으나, 국공합작이 결렬되자 난창 봉기에 가담하였다...

[일본 무가 정권 수립의 기초를 쌓은 인물]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

"천자섭관어영(天子摂関御影)"의 기요모리 초상(남북조 시대) 다이라노 기요모리(일본어: 平清盛 타이라노 키요모리[*], 1118년 ~ 1181년 3월 20일)는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말기의 무장(武將)·공경(公卿)이다. 이세 헤이시(伊勢平氏)의 동량(棟梁)[1] 다이라노 다다모리(平忠盛)의 장남으로서 호겐(保元)의 난에서 고시라카와(後白河) 천황의 신뢰를 얻었고, 헤이지(平治)의 난으로 겐지(源氏)에게도 승리를 거두어 ‘헤이케 천하’를 이루었고, 무사로써는 최초로 종1위 다이조다이진(太政大臣)의 자리에 올랐다. 또한 딸 도쿠코(德子)를 다카쿠라(高倉) 천황에게 입궁시키는 등 황실의 외척으로서 조정의 주요 요직에 일문의 사람을 들어앉히며 ‘헤이케가 아니면 사람도 아니다.’(헤이케 이야기平家物語)[2]라고..

[현대] 쏭자오런 암살사건[宋教仁暗殺事件]

宋教仁暗殺事件 Assassination of Song Jiaoren 1. 개요 1913년 3월 20일, 위안스카이의 사주로 중국 국민당 정치인 쑹자오런에게 가해진 암살 시도. 결국 부상을 입은 쑹자오런은 3월 22일 사망했다. 한국식 독음으로는 송교인 암살 사건. 2. 배경 쑨원과 위안스카이는 임시정부를 난징에 둘 것, 위안스카이가 난징에서 대총통에 취임할 것, 임시 참의원이 정하는 임시 약법을 준수할 것이라는 조건에 대해 합의했다. 1912년 2월 15일 임시 참의원은 위안스카이를 임시대총통에 선출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난징에서 취임하는 것을 거부하고 3월 10일 베이징에서 임시대총통에 취임했다. 위안스카이는 탕사오이를 국무총리에 임명하고 그 자신이 동맹회원이기도 한 탕사오이는 이라 불리는 동맹회 ..

[류사오치의 여섯 번째 부인] 왕광메이(王光美)

Wang Guangmei, in 1949. 왕광메이(王光美(왕광미), 1921년 9월 26일 ~ 2006년 10월 13일)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여성 물리학자 겸 정치가이고 류사오치(劉少奇) 前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원수의 6번째 부인이며 중국공산당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을 역임하였다. 생애 일생 중화민국 허베이 성 베이핑(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중화민국 허베이 성 톈진(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톈진)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 그녀의 부군은 1949년부터 1954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 제5국가부원수를 지내었고 1954년부터 1959년까지 중국공산당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지내었으며 1959년부터 1968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원수를 지낸 류사오치(劉少奇)이다. 학력..

[마오쩌둥의 비서, 문화대혁명 주도자 중 1인]천보다 ( 陈伯达, 陳伯達)

천보다 (중국어 간체자: 陈伯达, 정체자: 陳伯達; pinyin, 병음: Chén Bódá, 진백달, 1904년 7월 29일 - 1989년 9월 22일)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가, 학자이다. 문화대혁명의 주도자 중 한 명이다. 자(字)는 중순(仲順). 생애 푸젠 성 출신으로, 1927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이 해 소련의 모스크바 중산 대학에 유학을 갔다. 1930년 귀국하여 베이핑 중국대학, 옌안 중국공산당 중앙당교, 마르스크레닌 학원에서 가르쳤다. 또한 행정가로서 중공 중앙선전부, 군사위원회, 중앙비서처, 중앙정치연구실등의 기관에서 일했다. 이 기간동안, "중국사대가족"《中国四大家族》, "가난한 나라의 큰도적 위안스카이" 《窃国大盗袁世凯》, "인민공적 장제스" 《人民公敌蒋介石》등의 정치적 저술을 하..

[명나라- 문화대혁명 시발이 된 해서파관의 주인공]해서[海瑞]

1. 개요 海瑞(1514년 1월 23일 ~ 1587년 11월 12일) 중국 명나라 시대의 명신. 2. 생애 1514년에 광동성 경산현(瓊山縣: 현 하이난성 하이커우시)에서 출생했다. 향시에 합격해 거인(1차 시험 합격자)이 되었으나 이후 회시에서 불합격하는 바람에 진사가 되지는 못했다. 이때문인지 지방의 하급관료로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처음 맡은 관직은 복건성의 남평현 교유였다고. 비록 하급관료이긴 했으나 강직한 성격과 검소한 생활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각지의 현령을 지내면서 선정을 펼쳤고 이런 덕에 유능하고 강직한 관료로 인정을 받아 중앙관료로 승진하여 호부주사에 발탁되었다. 당시는 희대의 막장황제 가정제 시기로, 가정제의 무능과 사치향락으로 명나라 전체가 휘청거리던 시절이었다. 이런 때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