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歷史) 마당 ♣ 1457

[아이티- 노예제도를 끝낸 인물]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 1743년 5월 20일 ~ 1803년 4월 7일)는 아이티의 혁명가, 독립 투사이다. 지금까지 가장 잘 알려진 흑인 투사들 중의 하나였고, 노예 제도를 끝내고, 프랑스로부터 아이티의 독립 운동을 이끌었다. 또한 프랑스 군의 장군과 생도밍그(산토도밍고의 프랑스어 이름)의 식민 통치자로도 지냈다. 생애 프랑수아 도미니크 투생(François Dominique Toussaint)이란 본명으로 현재 카프아이티앵 근처에서 노예로 태어나 마부로 일했다. 거의 50세 때까지 노예로 지내왔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프랑스어를 읽고 쓰는 것을 배웠다. 볼테르등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책을 읽으며 혁명가가 되었다.[1] 1791년 프랑스 식민지 생도밍그에서 노예 혁명이 ..

[노예제 폐지론자]Thomas Clarkson/William Wilberforce

Thomas Clarkson[토마스 클라크슨] 1760. 3. 28, 잉글랜드 케임브리지셔 위즈비치~1846. 9. 26, 서퍽 입스위치 영국의 노예제 폐지론자. 영국에서 노예 무역과 식민지의 노예제에 반대하는 운동을 효과적으로 홍보한 최초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클라크슨은 성직에 들어가 부제로 서품을 받았지만, 1785년부터 노예제 폐지에 인생을 바쳤다. 1786년 〈노예 제도와 인간 무역에 관한 시론 An Essay on the Slavery and Commerce of the Human Species〉을 출간했는데 이를 계기로 그랜빌 샤프와 윌리엄 윌버포스를 비롯한 노예제 반대론자들과 사귀게 되었다. 1787년에 그는 이들과 함께 노예 무역 폐지를 위한 단체를 결성했다. 또한 그의 논설은 에..

[퇴계 제자 중 도산서원에 배향된 유일한 인물]조목(趙穆)

조목(趙穆)1524(중종 19) ~1606(선조 39) 본관은 횡성. 자는 사경, 호는 월천·동고. 아버지는 대춘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2년(명종 7)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대과를 포기하고 경전 연구와 수양에만 전념했다. 그뒤 동몽교관·공릉참봉·집경전참봉·종부시주부·공조좌랑 등에 임명되었으나 이내 사직했다. 1576년 봉화현감으로 잠시 봉직하며 교육진흥에 힘썼으며, 1594년에는 군자감주부로서 일본과의 강화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뒤 장악원정·사재감정·공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했다. 일생 동안 이황을 가까이에서 모셨으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몰두하여 대학자로 존경을 받았다. 경학에 능통했으며, 이기에 대한 사변적 분석을 지양하고 인심도심을 중심으로 하는 심학의 체인..

[쇼와 시대(1926~1989) 대표 가수]미소라 히바리(일본어: 美空 ひば)

1953년의 미소라 히바리. 미소라 히바리(일본어: 美空 ひばり, 1937년 5월 29일 ~ 1989년 6월 24일)는 일본의 쇼와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이자 배우로,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이소고구에서 태어났다. 세이카 학원(精華学園) 고등부를 졸업했으며, 본명은 가토 가즈에(일본어: 加藤 和枝)다. 사후에 일본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국민영예상을 수상했다. 인물과 경력 전성기 데뷔 초기 모습 1949년 7월에 《갓파 부기우기(河童ブギウギ)》를 통해 가수로 데뷔했으며 데뷔 싱글과 첫 주연을 맡은 영화《카나시키 쿠치부에(悲しき口笛)》의 동명의 주제가까지 연이어 히트를 치게된다. 1950년 영화 《도쿄 키드(東京キッド)》에 출연하여 큰 인기를 얻는다. 1957년 1월 13일, 국제극장에서 공연도중 동갑내기 여성 ..

[헤이세이 시대 대표가수]아무로 나미에[安室 奈美恵]Namie Amuro

2017년, 데뷔 25주년 오키나와 라이브에서 아무로 나미에(일본어: 安室 奈美恵, 1977년 9월 20일 ~ )는 일본의 알앤비와 팝 가수, 엔터테이너 그리고 배우이다. 아무로 나미에는 오키나와현 나하시에서 태어나 14세의 나이로 1992년 일본 아이돌 걸 그룹 슈퍼 몽키즈의 첫 싱글 "恋のキュート・ビート/ミスターU.S.A."로 데뷔한다. 이 그룹의 음악은 대부분 실패하지만, 팀명을 아무로 나미에 위드 슈퍼 몽키즈로 바꾼 후 1995년 "TRY ME 〜私を信じて〜" 싱글로 큰 성공을 거둔다. 같은 해 10월 그녀는 에이벡스 트랙스와 계약하며 Body Feels EXIT 싱글로 솔로 데뷔를 한다. 이때부터 아무로는 프로듀서 코무로 테츠야의 지도 하에 음반 작업 및 발매를 하였으며, 이는 대중적인 성공을 ..

[일본으로부터 사할린 섬을 빼앗은 인물]니콜라이 페트로비치 레자노프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레자노프(러시아어: Николай Петрович Резанов, 1764년 3월 28일 - 1807년 3월 13일) 러시아의 무역상·외교가·행정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알래스카와 북태평양 지역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러시아아메리카회사를 설립했다(→ 러시아아메리카회사). 그는 북아메리카의 서해안지역을 러시아에 병합하고 이 지역에 러시아인의 대규모 이주를 장려하고자 했으나 그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러시아 정부는 그 계획을 거의 실현하지 못했다. 이것은 1867년 러시아가 알래스카를 미국에 파는 실수를 초래한 간접적 원인이 되었다. 레자노프는 셸레크호프골리코프모피회사의 사원이었다가 1795년 사장이 되어 북아메리카 북서부 해안지역의 러시아 식민지에서 무역업을 했다. 1799년..

[군벌, 중화민국 총리, 임시집정]돤치루이(段祺瑞)

1913년 6월 사진. 돤치루이(중국어 정체자: 段祺瑞, 병음: Duàn Qíruì, 1865년 3월 6일 ~ 1936년 11월 2일)은 중국의 군벌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1916년부터 1920년까지 중화민국의 최고 권력자였으며, 중화민국의 국무총리와 임시집정을 역임하였다. 독일에서 군사학을 공부했다. 1911년 신해혁명 뒤에는 위안스카이 총통 밑에서 육군총장이 되었다. 1916년 위안스카이가 죽은 뒤 총리가 되어 정권을 장악했다. 1917년 그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일본의 지원을 받아들여 일본의 중국 진출을 허용했다. 1919년 5월 4일, 돤치루이 정부의 친일적 행보에 항의하는 반일 운동이 베이징에서 일어나 전국을 휩쓸었다.(5.4 운동) 1920년 7월에 그의 군대가 다른 군벌들에 패해 정치..

[청일전쟁시 평양성 문을 열어 군신 호칭(1호)을 받은 인물]하라다 주키치

하라다 주키치는 평양명승사진그림엽서에 청일전쟁영웅으로 그 이름이 명시되어 시, 공간을 넘어 불특정 다수의 시선에 환기된 특이한 존재였다. 그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머슴살이를 하다가 청일전쟁 때 일개 병사로써 큰 공을 세워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전쟁영웅으로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당시의 미디어는 그의 공적을 미화하여 대대적으로 현창함으로써 또 다른 영웅의 탄생을 부추기는 멸사봉공, 충군애국 이데올로기를 확산시켰다. 그러나 생활고 끝에 유랑예인의 길로 들어선 그는 "몰락한 영웅"으로 표상되었다. 한동안 대중들로부터 잊어지고 있던 그는 1930년대 만주사변 등 나라의 비상사태에 즈음하여 다시 미디어에 등장하여 전쟁미담의 주인공으로 재소환 된다. 즉 필요에 따라 그를 국가주의 애국담론에 소환, 환기..

[카톨릭을 믿어 국외로 추방된 다이묘]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

다카야마 우콘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 1552년 ~ 1615년)은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의 무장, 다이묘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기리시탄 다이묘로서 알려져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복자. 세례명은 유스토(Justo)이다. 아버지는 셋쓰국인 다카야마 도모테루(高山友照)이며 어머니는 마리아이다. 셋쓰국인 나카가와 기요히데와는 사촌형제간이다. 1563년 아버지와 함께 영세를 받았다. 이후 건실한 신앙 생활을 계속했는데 자신이 섬기는 주군은 항상 징크스격으로 패망하였다.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바테렌 추방령을 내림에 따라 그리스도교에 온건한 입장이던 마에다 도시이에에게 의존하였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리스도교 금령을 공포하자 우콘은 추방되다시피 필리핀 마닐라로 이주하고 마지막 여생은 ..

[정유재란-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 사망 후 대신 지휘했다고 알려진 인물]이문욱(李文彧) 혹은 손문욱(孫文彧)

손문욱(孫文彧):생몰년 미상 조선시대 부장, 만호, 첨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무신. 생애 및 활동사항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 왜군의 포로가 되어 오랫동안 일본에 억류, 돌아올 때 일본 사정을 자세히 탐지해와 당면한 군사·외교 등의 전략상에 기여하였다. 1598년(선조 31) 노량해전 당시 이순신(李舜臣) 휘하에 참전, 이순신이 전사하자 임기응변으로 그의 죽음을 비밀에 붙인 다음 자신이 직접 갑판 위에 올라가 북을 치며 평상시와 다름없이 군사들을 지휘, 독전(督戰)함으로써 마침내 승전할 수 있게 하였다. 1604년 승장(僧將) 유정(惟政)과 함께 일본에 들어가 임진왜란의 사태수습에 공을 세우고 조선인 포로 3,000여 명을 이끌고 돌아온 뒤, 2년 뒤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에 파견되어 전란의 뒤처리를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