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歷史) 마당 ♣ 1457

[조선 후기 -우리나라 최초의 필리핀어 통역사]문순득[文順得]

文順得(1777년 ~ 1847년). 조선 후기 신안군 우이도(牛耳島)에 살면서 일대에서 홍어를 거래했던 어물 장수. 평범한 일개 백성이던 문순득이 조선왕조실록에 이름 석 자를 남긴 이유는 파란만장한 삶 때문이었다. 2. 생애 2.1. 1차 표류 1801년 12월, 24살의 청년 문순득은 작은 아버지와 마을 주민 6명을 따라 흑산도에서 홍어를 사기 위해 태사도(太砂島)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난다. 바다에서 표류하던 이들은 기적처럼 살아 1802년 1월 유구국(琉球國)에 표착한다. 다행히 현지인들은 표류자들을 잘 보살펴주었고, 문순득 일행은 그곳에서 매일 쌀과 채소를 받고 하루 넘어 돼지고기를 제공받았으며, 병이 들면 의원이 와서 진찰해주는 등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8개월 동안 유구국에서 생활한..

[근현대 - 가오강 라오수스 사건을 일으킨 인물]가오강(高岗)

가오강(高岗, 1905년 ~ 1954년 8월)은 국공 내전 중,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초기의 중국공산당(CCP)의 지도자이다. 1949년 전부터 CCP 내의 첫 주요 축출 희생자가 되었다. 이른바 "가오강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여전히 논란의 주제가 되고 있다. 이 주제에 관한 연구가 한정된 수준으로 이루어졌는데, 부분적으로는 이용 가능한 정보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에 기인한다. 1905년 산시성에서 태어난 가오강은 1926년 중국공산당에 들어가 국공 내전 기간 중에 그곳에서 혁명적인 유격 기지를 이끌었다.[1] 그의 배경은 낮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소작농이었다. 매우 학식있는 자는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2][3] 중국공산당 내 자신의 동료 사이에서 그는 상당한 신뢰와 야망을 가진 것과 바람둥이인 ..

[명나라:궁녀들이 황제"가정제"를 죽이려 한 사건]임인궁변(壬寅宮變)

명나라 제11대 황제 가정제(재위 1521년 ~ 1567년)는 도교를 신봉하여 궁녀의 월경 혈과 아침 이슬 등으로 불사의 약을 만든다고 궁녀들을 학대했다. 또 궁녀들이 조금이라도 비위를 거슬리게 하면 사정없이 매를 쳤다. 그가 얼마나 궁녀들을 혹사시켰는지, 여기에 견디지 못한 16명의 궁녀들이 애첩과 동침하고 있던 황제를 목졸라 죽이려고 시도했다. 이 사태를 임인궁변(壬寅宮變)이라 한다. 궁녀들의 계획이 성공하여 가정제가 죽었다면 역사상 최악의 죽음을 당한 황제가 되었겠지만[5], 황후가 그를 구해주는데 성공하고 말았다. 물론 가정제 암살을 시도한 16명의 궁녀들은 전원이 저자거리에 끌려가 능지처참을 당했다. 이 불쌍한 궁녀들의 이름은 양금영(楊金英), 형취련(刑翠蓮), 양옥향(楊玉香), 소천약(蘇天藥)..

[원- 쿠빌라이 칸의 스승]허형[Hsu Heng, 許衡]

허형[Hsu Heng, 許衡] 중국 원대(元代:1279~1368)의 대표적 학자. 자는 중평, 호는 노재. 허난 성[河南省] 농민 출신으로, 정이·주희(朱熹)에게 깊은 영향을 받아 요추 등과 여러 학문을 연구했다. 쿠빌라이 칸이 즉위하기 전에는 경조제학을 지냈으며, 즉위한 뒤에는 국자좨주[國子祭酒]에 임명되었다. 중국의 전통적 방법에 의한 통치를 권고하여 이를 채택시켰으며, 관제·조의 등도 제정했다. 1271년에 집현대학사 겸 국자좨주의 자격으로 몽골족 자제의 교육을 맡았으며, 1276년에는 수시력 작성에 참가했다. 화북의 주자학이 성행하게 된 것은 그의 공적이다. 특별히 창조적인 견해를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유학이 침체해 있던 원대에는 두드러진 존재였다. 저서로는 〈허문정공유서 許文正公遺書〉(12권)..

[조선 전기-스스로 목숨을 끊은 양영대군의 3남]서산군 이혜(瑞山君 李譿

서산군 이혜 묘소 (왼쪽이 서산군, 오른쪽은 군부인 김씨 묘소 서산군 이혜(瑞山君 李譿, ? - 1451년 4월 10일)은 조선시대 전기의 왕족으로 태종의 손자이며,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적 3남이다. 세종대왕의 조카이다. 정효전 등과 기생을 놓고 다투었다가 탄핵을 받고 파직된 바 있고, 이름은 혜(譿),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그 뒤 음주 후 구타, 살인을 했고 몰래 탈출하는 등의 물의를 빚었는데 실록에서는 이혜가 망가진 원인을 사랑했던 첩을 아버지에게 빼앗기고 난 후에 울화병이 생겼다 한다. 1451년(문종 1) 유배지에서 자결 시도를 하였고 이틀 뒤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생애 초반 조선전기의 왕족으로 본관은 전주이씨(全州李氏), 휘는 혜(譿)이다. 태종의 손자이며, 세종, 효령대군 이보, 성녕대..

[조선 초기:환관 출신 경복궁 설계자]김사행[金師幸]

김사행[金師幸]?~1398년(태조 7) 조선전기 겸판사헌부사, 판경흥부사 동판도평의사사 등을 역임한 환관. 생애 및 활동사항 초명은 김광대(金廣大).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판내부사(判內府事)에 이르렀으며, 1357년(공민왕 6) 왕의 뜻을 좇아 정릉영전(正陵影殿)의 대역사를 일으켜 많은 재력을 소모하였다. 1374년 9월에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선왕 때의 대역사를 일으킨 죄로 익주의 관노가 되고 가산이 몰수되었으나 곧 풀려나왔다. 1391년(공양왕 3)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가 되어 경연에 참석하려는 왕에게 경연에 하루 참석하지 않아도 정사에 해로울 것이 없다 하여, 나가지 못하게 하고 불법을 강론하여 이를 믿게 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이듬해에 태조의 명을 따라 팔각전을 보수하였으며, 이 해 ..

[고려 후기 - 거란유종의 침입과 관련된 기녀]자운선[紫雲仙]

[생몰년 미상] 기생 출신이다. 무신집권자 이의민(李義旼)의 아들 이지영(李至榮)을 섬겼다. 이지영이 삭주(朔州) 분도장군(分道將軍)이었을 때 본래 부역의 의무가 없던 흥화도(興化道)와 운중도(雲中道)의 양수척(楊水尺: 水尺·禾尺·무자리라고도 하며, 변경지대에 주로 살았고 水草를 따라 돌아다니면서 사냥과 柳器를 만들어 파는 것을 업으로 삼은 천민집단)을 자신의 애기(愛妓)였던 자운선에게 소속시켜 공물을 징수하도록 하였다. 이에 자운선은 양수척의 명단을 호적에 올린 후 끊임없이 공물을 징발하였다고 한다. 최충헌(崔忠獻)이 이지영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자 자운선을 첩(妾)으로 삼아 총애하였다. 이후 자운선은 더욱 심하게 사람 수를 따져 공물을 징수하였다. 이로 인하여 양수척들이 크게 원망하였으며, 거란유종(契..

[아메리카 원주민] 오세이지족[Osage]

수어족(語族)에 속하는 데기하어를 쓰는 북아메리카 인디언. 데기하어를 쓰는 다른 부족들(오마하족·퐁카족·칸사족·콰포족)처럼 대서양 연안에서부터 서쪽으로 이주하여, 처음에는 버지니아 주와 캐롤라이나 주에 걸쳐 있는 서배너 강 사이의 피에몬테 고원에 정착했으나, 얼마 후 오자크 고원과 지금의 미주리 주 서부 초원지대로 옮겼다. 이 때 5부족이 서로 분리된 뒤 오세이지족은 오세이지 강변 마을에 남게 되었다. 이 마을에 대한 기록은 자크 마르케트가 1673년에 쓴 방문기에 남아 있다. 오세이지족은 19세기초까지 계속 그 지역에서 살다가 미주리 주 영토를 미국 정부에 양도하고 캔자스 주 니오쇼 강 유역으로 옮겼다. 오세이지족의 문화는 농사와 들소 사냥을 독특하게 결합한 전형적인 초원지대 문화의 특징을 갖고 있었으..

[조선 후기 - 순조의 외숙]박종경(朴宗慶)

박종경(朴宗慶, 1765년 ~ 1817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여회(汝會), 호는 돈암(敦巖)이다. 본관은 반남. 호는 돈암. 아버지는 판서 준원이고, 어머니는 원경유의 딸이다. 누이가 순조의 생모인 수빈(綬嬪)이다. 1790년(정조 14) 진사시에 합격한 뒤 음보로 등용되어 동몽교관·순안현령·충훈부도사를 지냈다. 1800년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올라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이듬해 홍문관부수찬으로 기용되었다. 그해 식년문과에 급제해 교리로 승진했다. 그뒤 홍문관제학·승지·참찬 등을 거쳐 판서를 지냈다. 1811년 평안도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훈련대장으로 있으면서 군인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진정시키기에 힘썼다. 1812년에는 호조판서로 있으면서 왕의 외숙이라고 위복을 누리며 뇌..

[중화인민공화국] 반우파 투쟁(反右派鬪爭)

1952년 이후 ‘백화제방(百花齊放) ·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는 슬로건 아래 진행된 백화제방 운동(百花齊放運動) 과정 중 사회주의와 공산당에 대해 비판을 전개했던 사람들을 ‘사회주의의 적’, ‘독초(毒草)’로 낙인을 찍어 ‘반혁명 분자’로 비난하기 시작하면서 ‘노동에 의한 사상개조’를 위해 농촌으로 보내졌다. 공산당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도 높은 민주동맹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민주당파들의 비판에 대해 1957년 6월 8일자 『인민일보』의 사설을 통해 공격했다. 이것은 이른바 반우파 투쟁의 전면적인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후의 사설들은 ‘제방과 쟁명’ 시기의 비판들을 반박하고 무정부 상태가 초래될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당 내외의 반대자들을 청소하는 이단 색출은 1년간 지속되었다. 반우파 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