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歷史) 마당 ♣ 1457

[인도네시아]스마랑 강간 사건

스마랑 강간(스마랑 위안소)사건은 일본군 점령 중 인도네시아 자바섬 스마랑(Semarang)에서 벌어진 일본군 군인의 네덜란드 여성 약 3백명을 위안부로 활용한 사건이다. 유일하게 자기 신원을 공개한 피해자 증인의 이름으로 '오헤른 사건'으로도 알려져 있다. 전시 일본군의 일본군 위안부 강제연행의 증거이기도 하다. 1994년 네덜란드정부는 최소 65명은 명확히 강제로 끌려간 증거가 있다고 밝혔으나, 2020년 현재 일본 아베내각은 스마랑 사건의 강제성도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다. 개요 1944년 2월 일본군 남방군 관할의 제16군 간부후보생 부대가 민간인 억류소에서 네덜란드인 여성을 강제 연행한 뒤 스마랑에 있던 위안소에 3개월간 감금하고 강간한 사건이다. 이 지역 위안소 총 4곳에 네덜란드 백인 여성만도..

[상(은)나라 -중국 최초의 여장군]부호(婦好, 푸하오)

무정 (상나라) 부호(婦好, 푸하오, ? ~ 기원전 1200년) 상나라[(商, 기원전 1600년경 ~ 기원전 1046년경) 역사적으로 실재했다고 여기는 최초 중국 왕조] 무정(武丁)의 왕후였다. 문자로서 기록된 중국 역사상 최초의 여자 정치가, 장군이다. 무정(武丁)은 결혼동맹으로 부족의 연맹을 가꾸었다. 부호는 그러한 결혼 통하여 상나라 황실에 입궁하였다. 무정은 그녀를 장군과 제사장으로도 임명하였다. 그녀는 13000명의 군대를 통솔하여 수많은 군사원정을 이끌었으며, 창족, 이족, 파족과 같은 주변 민족을 격파하였다. 그녀의 전공은 갑골문에 기록되었다. 부호의 무덤은 은허에서 발굴되었는데 청동기와 도기들이 부장되어 있었다. 부호의 무덤은 1976년에 발굴되어 공개되어 있다.[위키백과] ==== Que..

[2차대전 전범 중 유일하게 미군에게 구타당한 인물]Hans Frank

사진 이름 한스 미하엘 프랑크 Hans Michael Frank 생몰년도 1900년 5월 23일 - 1946년 10월 16일 직책 폴란드 총독 변호사 1. 생애[편집] 독일 제국 바덴 대공국의 도시였던 칼스루에에서 중류 가톨릭 가정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난 한스 프랑크는 1923년 9월에 돌격대에 입대했다. 그리고 1923년 11월의 뮌헨 봉기에도 참가했는데 봉기는 실패하여 히틀러는 체포되었다. 그러나 프랑크는 체포되지 않아 후에 뮌헨 재판소에서 열린 히틀러의 재판에서 그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가 되기도 했다. 1924년에 킬 대학으로부터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프랑크는 부친의 법률사무소를 도왔는데 1925년에 아버지가 횡령 혐의로 체포되면서 변호사 자격을 상실했다.(1928년에 복권) 1926년에 사법..

[일본의 만주점령기- 일본군에 의한 중국 양민 학살]핑딩산 학살 사건(Pingdingshan massacre, 平頂山事件)

핑딩산 사건(平頂山事件)은 1932년 9월 16일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 성 북부 푸순 시에서 일본군이 게릴라 토벌작전을 벌인다며 핑딩산(平頂山) 부락의 주민을 다수 학살한 사건을 가리킨다. 희생자 수에 대해서는 3천명(중국)이라는 설과 400~800명(일본 학자)이라는 설이 엇갈리지만 일본군이 민간인을 다수 학살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이는 없다.[위키백과] [참고자료 있는 곳] 일제의 중국인 3천명 학살시 조선인은 모두 살려주었다. 2014.01.18 울컥` 매일경제 원문 입력 2014.01.17 17:33 중국 랴오닝성 푸순시에 있는 핑딩산학살사건기념관에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는 유골의 처참한 모습. <정혁훈 특파원... blog.daum.net/yescheers/8598621 안 산 김 ..

[조선 - 연산군과 아내가 간통하는 걸 묵인할 수밖에 없었던 문신]윤순 (尹珣)

윤순(尹珣) [? ~ 1522(중종 17)] 조선전기 함경도관찰사, 판윤,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백옥(伯玉), 호는 임심(臨深). 대사헌 윤번(尹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의정 파천군(坡川君) 윤사흔(尹士昕)이다. 아버지는 형조판서 윤계겸(尹繼謙)이며, 어머니는 김진손(金震孫)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사과(司果)로 재직하던 중, 1501년(연산군 7) 식년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사간원정언에 제수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가 이듬해 한자급 올려받았고, 지중추부사로 1507년(중종 2) 주문사(奏聞使) 노공필(盧公弼)과 함께 명나라에 가 승습(承襲: 작위나 보위를 이어받음.) 주청(奏請: 아뢰어 요구함.)의 ..

[일제강점기 기녀출신 항일 독립운동가]정칠성(丁七星)

정칠성 (丁七星, 1897년 ~ 1958년?)은 대한제국의 기녀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에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한 항일 독립 운동가이다.[상세 해설 보기: ko.wikipedia.org/wiki/%EC%A0%95%EC%B9%A0%EC%84%B1 대구 출신으로 이명은 정금죽(丁錦竹)이다. 상경 후 남도 기생들이 중심이 된 한남권번(漢南券番)의 기생이 되었다. 1922년 일본 동경(東京)의 영어강습소에서 수학하고, 1923년 귀국한 뒤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했다. 10월 대구여자청년회 창립을 주도하고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1924년 5월 우리나라 최초의 전국적인 여성운동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 결성에 참여해 발기인·집행위원이 되었다. 1925년 경북 도 단위 사상단체인 사합동맹(四合同盟) 결성에 참여하였다. 같은 ..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항일 운동가]이관수(李觀洙)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이관수(李觀洙)[1925~1951]는 1925년 10월 22일에 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 괘법리 827-5번지[현 부산광역시 사상구 괘법동 266-15번지]에서 태어났다. 1944년 결성된 항일운동 단체 순국당(殉國黨)의 당수인 차병곤(車炳坤)과 내외종간이다. 1938년 동래중학교[현 동래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940년 동래중학교에서 김병현(金柄鉉)·양중모(梁仲模)·남기명(南基明)·김일규를 중심으로 독서회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1941년 겨울에 독서회를 강화하여 항일 학생 조직인 조선청년독립당을 결성하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의하였다. 조선청년독립당은 1942년 봄에 남기명(南基明)의 집에서 2차 회합을 갖고 강령을 정하는 한편 항일 투쟁의 ..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항일 노동운동가]김형선( 金炯善)

김형선( 金炯善). 1904~1950) 개설 본적은 경상남도 마산(馬山). 이명은 김원식(金元植), 최명환(崔命煥). 어머니가 민족 사상이 격렬해 자식들에게 많은 감화를 주었다고 한다. 여동생 김명시(金命時)와 남동생 김형윤(金炯潤)도 당대의 유명한 공산주의자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열 네 살에 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마산공립간이농업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학자금 부족으로 1학년 1학기만을 마치고 상점 점원 또는 부두 노동에 종사했다. 마산창고회사가 설립되자 사무원(서기)으로 5년간 근무하다가 직원 정리로 말미암아 실직했다. 일찍부터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마산청년회와 마산해륙운수조합 등에서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1923년 8월에 결성된 마산의 사회주의 사상단체 혜..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항일 여성운동가]이순금(李順今)

이순금(1912년~?)은 한국의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공산주의 운동가이다. 월북하였다. 생애[편집] 경상남도 울산 출신.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1946년 정판사(精版社) 위조지폐 사건으로 미군정에 검거되어 1950년 6월 대전형무소에서 복역중 처형당한 이관술(李觀述)의 여동생이다. 이관술과 이순금은 어머니가 달랐다. 아버지 이종락은 울산군 범서면 입암리의 유서 깊은 양반 가문의 장자였다. 일찍 결혼한 첫 아내가 이관술을 낳고 죽자 재혼해 두 자녀를 두었는데 다시 주막집 주모와의 사이에 태어난 게 이순금이다. 술집 주모의 이름은 김남이로, 딸 하나를 가진 과부였다. 언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 4월 서울실천(實踐)여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년 뒤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하였다. 이효정, ..

[일제강점기- 공산주의계열 항일 독립운동가 겸 국문학자]김태준(金台俊)

김태준(金台俊, 1905년 ~ 1949년)은 일제강점기때 활동한 공산주의계열 독립운동가다. 한문학자이자 국문학자이다. 한국 문학사의 기초를 닦은 연구자였다. 일제강점기말 경성콤그룹에서 활동했다. 호는 '천태산인'(天台山人). 한국 최초로 비교문학적 관점에서 〈조선소설사〉와 〈조선한문학사〉를 썼다. 생애 평안북도 운산 출신으로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국문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20대이던 1931년 ‘조선소설사’와 ‘조선한문학사’를 발표한 그는 경성제대 최초의 조선인 강사로 문학을 가르쳤고 1940년 여름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을 발굴했다. 김태준은 제자 이용준에게서 “우리 집안에 훈민정음이 가보로 내려오고 있다”(엄밀히 자신의 집안이 아니고 자신의 처가인 광산김씨 종가, 긍구당 서고에 보관되어 있던 것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