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歷史) 마당 ♣ 1457

[일제 강점기 항일 사회주의 여성 운동가]박진홍(朴鎭洪)

박진홍(朴鎭洪, 1914~ ? )는 일제하 1930년대 노동운동, 독립운동을 이끈 인물. 해방 이후 민주주의민족전선 사회정책 연구위원,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다. 생애 박진홍은 함경도 명천 출신이다. 가난을 못이겨 고향살림을 접은 부모를 좇아 서울로 온 것은 1928년이니, 15살 때였다. 천도교에서 세운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는데 입주 가정교사로 학자금을 대었다. 동덕여고는 3·1운동을 주도했고 이후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민족학교’다. 작가를 꿈꾸는 문학소녀였다. 공부도 잘했다. 박진홍은 줄곧 전교 1등을 해 ‘개교 이래 최고의 수재’로 불렸다'. 동덕여고 동기생이자 친구였던 이효정과 함께 사회주의자로 항일의 걸을 걸었다. 경성 관훈동, 지금의 안국동 교차로 남..

[조선 중기 - 주인의 원수를 살해한 충비]갑이(甲伊)

[야사] 충비 갑이는 조선 중기 문신 류관의 노비이다. 류관이 을사사화 때 처형 당하고 본인은 병조판서 정순붕의 노비로 들어가게 되자 기회를 잡아 정순붕이 역질에 걸려 죽게 만들었다. 안산역사] 충비(忠婢) 갑이(甲伊)의 무덤 2010.06.22 [안산역사] 충비(忠婢) 갑이(甲伊)의 무덤 [가는길] 안산2교(안산 IC입구사거리)에서 면허시험장 방향으로 직진하다 보면 공원묘지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300m정도...[blog.daum.net/solhouguli/51] 류관(柳灌, 1484년 ~ 1545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문화. 자는 관지(灌之), 호는 송암(松庵). 인종 때 좌의정을 지냈다. 성품이 곧고 강직하여, 이조판서로 있을 때 병조판서 이기의 전횡을 탄핵했는데, 이기와 대립을 했고..

[동진 - 흑인 황후로 대를 이은 12대 황제] 간문제(太宗 簡文皇帝)

1. 소개 진나라(晉)의 제12대 황제이자, 동진(東晉)의 제8대 황제. 자는 도만(道萬). 2. 생애 태흥 3년(320년), 원제 사마예와 정아춘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3살 때 낭야왕, 7살 때 회계왕이 되었다. 영화 원년(345년), 무군 대장군이 되고 상서를 관장했으며 이듬해 2월, 황제 보좌에 참여했다. 태화 원년(366년) 10월에는 승상이 되고, 함화 원년(366년) 11월, 환온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는 폐제 사마혁의 할아버지인 명제 사마소의 이복동생이었으므로 사마혁의 작은 할아버지였다. 황제에 즉위한 후, 대사마 환온을 불러놓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는데 은근히 양심이 찔리던 환온은 땀을 흘리며 아무 말도 못했다. 사마욱은 어릴 때부터 총명해서 원제 사마예의 사랑을 받았고 풍채가 ..

[한국전쟁(6.25 전쟁) 시 대전 교도소 재소자 및 보도연맹원을 학살한 인물]심용현

심용현(1918년 8월 30일 ~ 1986년 7월 20일)은 군인이며 학교법인 성신학원 이사장을 지냈다. 6.25 당시 대전형무소 재소자 및 대전·충남지역 보도연맹원 3200명을 즉결처형한 주범으로 지목받고 있다.생애1918년 8월 30일 생으로 서울 용산구 한강로가 주소지였다. 그는 서울중앙고등보통학교(5년제)를 나온 후 육사 8기로 1949년 2월 입대해 3개월의 교육을 받고, 1949년 5월 23일 소위로 임관했다. 그가 헌병 주특기(9110)를 받고, 대전에 있던 2사단 헌병대에 배치를 받은 것은 1949년 7월 7일이었다. 그러다가 1950년 5월 1일 중위로 진급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군경은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복역수, 예비검속자, 보도연맹원을 학살했다. 1950년 7월..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 항일운동가]이관술(李觀述)

이관술 (李觀述) 동덕여자고등학교 교사 시절 이관술 1900년 4월 26일(1900-04-26) 대한제국 강원도 울도군 울릉도 (현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도) 1950년 7월 3일(1950-07-03) (50세) 골령골 남성 대한제국 독립운동가, 노동운동가, 교육자 이관술(李觀述, 1900년 4월 26일[1] - 1950년 7월 3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 노동운동가이다. 일제 강점기에 사회주의 계열 단체에서 활동한 노동운동가이며, 해방 직후에는 조선공산당과 남조선로동당의 간부였다. 박헌영의 최측근이기도 했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1900년 울릉도 출신이고, 울산에서 성장 후, 일본에 유학하여,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아버지 이종락은 울산군 범서면 입암리의 유서 깊..

[1차대전의 용장, 2차대전의 졸장]모리스 G. 가믈랭( Maurice Gustave Gamelin,

모리스 G. 가믈랭(프랑스어: Maurice Gustave Gamelin, 1872년 9월 20일 ~ 1958년 4월 18일) 독일의 침공(1940. 5)을 막아내지 못하여 1940년 6월 프랑스는 붕괴되었다. 1893년 생시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육군 준장이었다. 전쟁 후 점차 지위가 올라가 1931년에 육군 참모총장, 1935년 최고군사회의 의장과 육군 감독관을 거쳐 1938년 합참의장에 임명되었다. 모리스 가믈랭은 마지노 선에 근거를 둔 방위전략을 강력히 지지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서부전선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당시 독일군의 대부분이 폴란드 전선에 투입되어 있었는데도 아무런 공세를 취하지 않았다. 그는 그후의 '위장전'에서도 마찬가지로 조..

[난징 대학살 당시 중국 여성 1만여 명을 구한 여선교사]미니 보트린(Minnie Vautrin)

미니 보트린(Minnie Vautrin, 1886년 9월 27일 ~ 1941년 5월 14일)은 미국의 선교사이다. 일리노이주에서 태어난 그녀는 대학 진학을 위해 어린 시절부터 일을 했으며, 일리노이 대학교 어바나-샴페인에서 공부하였다. 대학 졸업 후 일리노이, 르로이(LeRoy, Illinois)에 있는 고등 학교에서 선생으로 근무하던 미니 보트린은 1912년, 선교사 겸 선생으로 중국에 건너가게 된다. 중국에 건너 간 처음 몇 년 동안 미니 보트린은 급여를 받지 않고 중국 안휘성의 작은 Luchowfu 주에 여학교를 세우는데 기여했고 얼마 뒤 난징에 진링 여자 대학교를 건립, 마침내 교장이 되었다.본명은 윌헬미나 보트린으로서 미니는 애칭이라고 볼 수 있다.난징대학살 당시 인도주의 활동미니는 난징대학살 ..

[한 문제 시기 문신] 풍당(馮唐)

풍당 풍당은 한나라 안릉(安陵) 사람으로, 문제(文帝)때 효행으로 이름이 드러나 중랑서장(中郞署長)이 되었다. 흉노의 침탈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문제에게 군주의 올바른 형정을 진언해 가납되기도 했으나, 좀체 승진하지 못하였다. 무제가 즉위한 뒤 현량(賢良)으로 천거되었지만 이미 나이가 90세를 넘겼기 때문에 대신 그의 아들 풍수(馮遂)가 낭(郎)으로 채용되었다. [문화콘텐츠 용어사전] 풍당(馮唐)의 조부는 전국 시대에 조(趙)나라 사람이었다. 그의 부친은 대(代)나라로 이주하여 살았다. 한(漢)나라가 흥기한 후에는 다시 안릉(安陵)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풍당은 당시에 효행(孝行)으로 명성이 널리 알려져서 중랑서(中郎署)의 장(長: 낭관)으로 천거되어 문제(文帝)를 섬겼다. ​ 한 번은 문제가 수레를 타고..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계 항일 여성 독립 운동가]이효정 (李孝貞)

이효정 (李孝貞) (1913~ 2010) 사회주의계 여성 노동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학창시절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다 종로경찰서에 붙잡혔고, 졸업 후에는 이재유 등이 지도하는 경성트로이카에 가담해 1933년 9월 종연방직 경성제사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나자 여직공을 선동하여 총파업을 지도했다. 1935년 경성지방좌익노동조합조직준비회에 가담해 항일 운동을 벌이다 다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사회주의 항일운동가 박두복과 결혼해 시댁으로 내려가서 살다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남편이 6·25전쟁 때 월북하고 이후 남파간첩으로 활동한 일 때문에 수시로 고문과 취조를 당하면서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참여정부 시절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재조명되면서 2006년 독립유공자로..

[몽골 제국 - 명장] 수부타이

수부타이(몽골어: ᠰᠥᠪᠡᠭᠡᠳᠡᠢ 수부게테이[Sübügätäi], 한국 한자: 速不臺 속불대, 1176년 ~ 1248년)는 몽골 제국의 개국공신으로 사구 중 한명이다. 우랑카이족(族) 출신으로, 용맹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고, 젤메·제베·쿠빌라이와 더불어 칭기즈칸의 4선봉(四先鋒)으로 불리며, 천호장(千戶長)에 임명되었다. 메르키트족의 잔병(殘兵)을 소탕하는 작전에서 큰 공을 세웠고, 칭기즈칸의 서정(西征) 때는 제베와 함께 코라즘 국왕 추격명령을 받고, 그를 카스피해(海)의 한 작은 섬으로 몰아넣어 죽게 했다. 뒤이어 이란·캅카스의 여러 도시를 공략하였고, 이어 남루스 초원으로 진격, 1223년 킵차크족과 루스 제후(諸侯)의 연합군을 궤멸시키고, 이 초원을 널리 공략한 후 돌아왔다. 1233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