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歷史) 마당 ♣ 1457

[메이지유신 정부군에게 참살당한 신센구미의 사실상 창시자]곤도 이사미(近藤勇)

곤도 이사미(일본어: 近藤勇, こんどう いさみ, 1834년 11월 9일 ~ 1868년 5월 17일)는 일본 신센구미의 국장이다. 이사미는 통칭으로, 휘는 마사요시(昌宜)이다. 게이오 4년(1868년)부터는 오쿠보 쓰요시(大久保剛)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이후 오쿠보 야마토(大久保大和)라 칭하였다. Birthplace of Kondo Isami in Chōfu 농부 미야카와 규지로와 어머니 미야카와 미요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릴적 이름은 가쓰고로(勝五郎)였다. 출신지는 무사시노쿠니 다마 군으로, 지금의 도쿄도 조후시에 해당한다. 가에이 원년(1849년), 천연이심류 검술 도장인 시위관에 입문하였다. 도장을 운영하던 곤도 슈스케는 이사미의 실력을 인정하여, "천연이심류를 이사미가 계승하게 하고 싶다"고..

[에도시대 말기 조직된 친막부 무사 조직]신센구미(新選組)

신센구미(일본어: 新選組)는 에도시대 말기인 1863년에 조직된 무사 조직이다. 원래는 교토로 가는 쇼군의 신변보호를 목적으로 조직되었으나 이후 교토의 치안유지를 목적으로 활동을 하였으며 막부에 반대하는 세력과 싸웠다. 이후 막부 체제가 붕괴하자 막부군의 일원으로 정부군에 저항하는 무진 전쟁에 참전하였다. 원래 에도에서 조직될 당시에는 '浪士組'(로시구미)라고 칭하였으나 이후 신센구미로 바꾸었다. 한자로는 '新撰組'라고 표기된 자료도 있으나 국장인 곤도 이사미도 '選'과 '撰'을 모두 썼다. 엄한 규율 유지를 위해 도입한 국중법도로 숙청을 하거나, '誠' 한 글자로 만든 깃발, 소매 부분에 톱니모양의 무늬를 넣은 독특한 하오리(羽織 - 일본옷 위에 입는 짧은 겉옷)복장으로 유명하다. 그들이 유명하게 된 ..

[메이지유신 세력에 반대해 싸우다 전사한 신센구미(新選組) 부장]히지카타 도시조(土方歳三)

도쿄에 있는 히지카타 도시조의 동상. 히지카타 도시조(일본어: 土方歳三, 1835년 5월 5일 ~ 1869년 5월 11일)는 신센구미 부장이었으며, 휘는 요시토요(義豊), 아명은 도요타마(豊玉)이다. 막말의 막신으로, 메이지 유신에 반발했던 인물이다. 생애 다마·시에이칸 1835년 5월 5일, 무사시 국 다마 군 이시다촌(현재 도쿄도 히노시 이시다)에서 농부인 히지카타 하야토(土方隼人)와 에쓰(恵津) 사이에서 태어났다. (6인 형제의 막내로서 자랐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최근에 발견한 자료에 의해 실제로는 10인 형제의 막내였던 것이 판명되었다. 히지카타 가는 '오다이진'(お大尽)으로 불리던 큰 농사꾼 집안이었다. 출생 전에 부친을 여의었고, 6세에는 어머니를 잃어 둘째 형인 기로쿠(喜六) 부부에게 키워졌..

[중일, 태평양 전쟁시 미군기 28대를 격추한 인물]사카이 사부로(坂井 三郞)

PO2/c Sakai in the cockpit of a Mitsubishi A5M Type 96 fighter (Hankow airfield, China in 1939) 사카이 사부로(일본어: 坂井 三郞, 1916년 8월 26일 ~ 2000년 9월 22일)는 일본 제국 해군 소속 전투기 파일럿이었다. 태평양 전쟁 종전을 맞았을 때, 최종 계급은 중위였다. 태평양 전쟁 때의 해군 소속 에이스 파일럿으로 알려져 있다. 전후에는 전쟁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인생관을 담은 책들을 출판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대공의 사무라이'다. 생애[편집] 1916년, 일본 사가현에서 태어났다. 사카이가 소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사망해 집안이 곤궁했지만, 그는 성적이 우수해 동경에 있는 백부 댁에 보내져 아오냐..

[카미가제 명령을 거부한 항공대장]시가 요시오 [志賀淑雄]

1938, 13 air Group, Nanjing Base 시가 요시오 (志賀淑雄) 1914, 도쿄시~2005. 11. 25.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선 당시의 일본 해군 파일럿이자 비행대 지휘관이다. 파일럿으로서는 활약상이 크게 알려져지 않은 비교적 마이너한 인물이지만, 종전 당시 미군 사이에서 가장 유명했던 일본의 파일럿이었으며 특히 당시 동료 파일럿들의 증언상으로는 지휘관으로서 대단히 존경받는 인물이었던 듯하다. 겐다 미노루와 사이가 돈독했던지라 겐다 미노루 옹호론자들이 내세우는 주장중에 '그 시가 요시오가 믿고 따랐던 사령관이다'라는 것이 있을 정도이다. 자신의 격추수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단독격추수는 6기입니다. 그리고 협력격추수는 그보다 더 많습니다. 어느 정도 공격해놓고나서 아직 ..

[파리 인육사건 범인]사가와 잇세이(佐川一政)

사가와 잇세이(일본어: 佐川一政, 1949년 4월 26일 ~ )는 1981년 4월 26일에 발생한 파리 인육 사건의 범인인 일본인 남성이다. 그는 범행 후 체포되어 범행을 자백하였으나, 심신상실 상태라는 이유로 무죄 선고를 받았다. 그가 범행의 경험을 토대로 1983년에 프랑스의 정신병원에 있는 동안 쓴 글은 같은 해 9월에 '안개 속'(霧の中)이라는 제목을 단 책으로 출판되었으며 [1], 이 책은 20만 권이 넘게 팔려나가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로 유명세를 타게 되자 '신센죠노 아리아'라는 성인 드라마에도 출연하였으며, 타블로이드 신문에 컬럼을 게재하기도 하였다. 파리 인육 사건[편집] 사가와 잇세이는 파리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던 일본인 유학생이었다. 1981년 6월 11일, 학급 동료였던 네..

[태평양 전쟁 관련]치치지마 식인 사건

치치지마 식인 사건 1. 개요 小笠原事件, 父島人肉食事事件 1945년 2월경 오가사와라 제도의 치치지마에서 벌어진 사건. 오가사와라 사건, 치치지마 사건(chichijima incident)이라고도 부른다. 산 사람을 일부러 살해하고 그 시신을 먹은 식인 사건이었으며 이 사건을 저지른 다치바나 요시오의 휘하 부대는 식량 부족으로 고생하던 형편도 아니었다. 오히려 임팔 작전 때 무타구치 렌야 휘하의 일본군 식량 사정이 훨씬 더 열악했다. 저때 임팔에서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당시 31사단장의 독단적 전선이탈과 그 전에 일본 군인들이 부른 노랫말을 보면 알 수 있다. 전쟁 중 식인을 했던 부대는 이들 말고도 더 있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극도로 처참한 전황에 굶어죽기 직전까지 몰린 자들의 최후의 선택이..

[삼국 시대-촉한, 서진의 정치가]동궐(董厥)/번건(樊建)

동궐(董厥, ? ~ ?) 삼국시대 촉한과 서진의 정치가. 자는 공습(龔襲). 의양 출신으로 제갈량이 승상으로 있을 때 승상부 영사가 되었으며, 제갈량이 그를 칭찬해 동영사는 훌륭한 선비다. 내가 매번 그와 말해보면 생각이 신중하고 조리에 맞구나. 라면서 주부로 삼았다가 제갈량이 죽은 후 승진해 상서복야에 이르렀다. 그 후 진지를 대신해 상서령이 되었다가 보국대장군이 되어 후임으로 상서령은 번건이 되었다. 261년에는 제갈첨과 함께 평상서사가 되어 제갈첨, 번건과 함께 염우로 대체할 것을 건의하지만 거절되었으며, 끝내 황호가 권세를 농단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고 한다. 263년에 위나라에서 촉 정벌군을 일으켰을 때 황호의 농간에 속아 뒤늦게 알게 된 유선은 동궐과 장익을 함께 지원부대가 되어 양안관구로 향하..

[철도왕, 러일전쟁 시 일본 전쟁공채를 매입하여 도운 인물]에드워드 헨리 해리먼(Edward Henry Harriman

1899년 에드워드 헨리 해리먼 에드워드 헨리 해리먼(Edward Henry Harriman, 1848년 2월 20일 - 1909년 9월 9일)는 미국의 사업가로 윌리엄 애버렐 해리먼의 아버지였으며, 미국 철도 회사의 중역이었다.[American railroad executive] 생애 1848년 2월 20일, 성공회 목사 올랜도 해리먼과 코넬리아 닐슨의 차남으로 뉴욕의 헴스테드에서 태어났다.[1] 형제로는 형 올랜도 해리먼 주니어가 한 명 있었다. 증조부 윌리엄 해리먼은 1795년에 잉글랜드에서 이주하여 무역과 상거래에 종사했다. 어릴 적 해리먼은 이후 해리먼 주립공원이 되는 로버트 파커 패럿 가문이 소유한 지역에 있는 그린우드 제철소에서 일을 하며, 여름을 보냈다. 14세에 학교를 중퇴하고 삼촌 올리..

[이승만 정권기 주일대표부 공사]유태하(柳泰夏)

유태하(柳泰夏)는 대한민국의 전 외교관이다. 생애 일제 강점기 내무성에서 일한 적이 있다. 기시 노부스케의 측근인 야쓰기 가즈오와 친했다.[1] 1958년 10월부터 1960년 4월까지 제8, 9대 주일 대표부 공사를 지냈다. 당시 최규하가 유태하의 밑에서 참사관으로 일했다. 기타 유태하는 주일 공사 시절 재일동포를 상대로 비자 장사 등 비리를 저지르다 재일교포 사회에서 추방운동의 대상이 됐다. 그는 4·19 혁명 직후 직위가 해제됐으나 본국 소환에 불응하다 5·16 쿠데타 이후 처벌됐다.[2] 당시 유태하 추방 운동을 벌인 이 중에는 조용수도 포함됐다.[3] 1961년 6월 24일 본국으로 소환된 뒤 구속됐다.[4][5] 1960년 4월 26일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할 때쯤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