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歷史) 마당 ♣ 1457

[삼국시대(후한말 혼란기)-원담에 대한 충절로 조조에게 발탁된 인물]왕수(王脩/王修)

왕수(王脩/王修, ? ~ ?)는 중국 후한 말 공융, 원담, 조조 휘하의 정치가로 자는 숙치(叔治)이며 청주 북해국 영릉현(營陵縣) 사람이다. 생애 공융 시절[편집] 7살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어미니는 사일(社日, 봄과 가을에 토지신에게 제사지내는 날)에 죽었는데 다음 해 이웃 마을에서 제사를 지내자 왕수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심히 슬퍼했다. 그 소리가 이웃 마을까지 들려 제사를 멈추었다. 20살에 남양군으로 유학해 장봉(張奉)의 집에 기거하였다. 장봉의 온 집안에 질병이 들자 왕수가 친히 보살폈다. 초평 연간에 북해국상 공융의 주부(主簿)가 되어 고밀현령(高密縣令)을 대리하였다[守]. 고밀에 손씨(孫氏) 성을 가진 호협한 자가 있었는데 그 문객들이 수차례 범법하였다. 어느 날 민간의 강도가 손씨한테로 ..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정약용과 경상도1 [영남일보 ]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정약용과 경상도1 [영남일보 ] 논의가 일어난다. 1938년 신조선사에서 영남유림 등의 도움을 받아 활자본 여유당전서...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여행작가·역사연구가부인이 보낸 치마폭을 종이 삼아... 유람하며, 유배와서…茶山은 경상도 흠모하는 마음을 글로 남겼다 부인이 보낸 치마폭을 종이 삼아 적은 하피첩. 오랜 유배 끝에 고향 남양주 마재로 돌아온 다산은 아내와 함께 18년을 더 살다가 75세에 세상을 떠났다. 고전·경학 저술 230권, 시문 70권, 경세·목민·의약 저술 200여권을 남겼다. 정인보는 오천년 역사에서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인물이라 했다. 조선 지성사에 우뚝 선 인물 다산 정약용. 경세, 고전, 경제, 의약, 국방, 천문, 지리 등 다방면에 통달했고 ..

[삼국시대 이전 혼란기(후한 말)-황제 추대된 것도 거절할 정도로 강직했으나 공손찬과 대립했다가 살해당한 인물]유우(劉虞)

유우(劉虞, ? ~ 193년)는 중국 후한 말의 관료로 자는 백안(伯安)이며 서주 동해국 담현(郯縣) 사람이다. 명제의 이복형인 동해공왕의 5세손[1]으로 조부 유가가 광록훈을 지냈다. 백성들의 신망을 크게 얻었으며 원소로부터 황제로 추대되기도 했는데 본인이 완강히 거절하였다. 이민족 정책을 놓고 공손찬과 대립하다가 살해당했다. 장거, 장순의 난을 평정 이미 황제와 촌수가 멀었으므로 현의 하급관리로 일했으나, 청렴하고 학식이 빼어났으므로 군(郡)으로 불려와 군리가 되었고, 군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효렴으로 천거되며 낭(郞)이 되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승진을 거듭한 끝에 유주자사에 이르렀는데, 민정에 능하고 온후하고 사려가 깊었으며 명성과 지위에 의지해 자신을 높이지 않고 항상 겸손하며 검약한 태도를..

[삼국시대 이전 혼란기(후한 말)-조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도망하다 잡혀 처형된 뒤 기림을 받은 인물]저수(沮授)

저수(沮授, ? ~ 200년)는 후한 말기의 관료로, 기주 광평군 사람이다. 기주목 원소를 섬겨 세력 구축에 크게 공헌하였으나, 미움을 사 좌천되었다. 생애 저수(沮授) 후한 ? ~ 건안 5년(200년) 기주 광평군 기주별가(冀州別駕) → 현령(縣令) → 현령(縣令) → 기주별가(冀州別駕) · 기도위(騎都尉)〔한복〕 → 감군(監軍) · 분위장군(奮威將軍)[1]〔원소〕 → 도독(都督)〔원소〕 한복 → 원소 젊을 때부터 큰 뜻을 품었고, 권모술수에 뛰어났다. 처음에는 기주별가(冀州別駕)를 지냈고, 이후 두 현[2] 에서 현령(縣令)을 지냈다. 훗날 기주목(冀州牧) 한복(韓馥)의 휘하에서 별가(別駕)·기도위(騎都尉)로써 그를 섬겼다.[3] 초평(初平) 2년(191), 한복이 원소(袁紹)에게 기주를 양도하려고 ..

[삼국시대 이전 혼란기(후한 말)-원소 부자 휘하에 있으면서 절의를 지켜 조조에게 출사하지 않은 인물]한형(韓珩)

한형(韓珩, ? ~ ?)은 중국 후한 말 원희 휘하의 정치가로 자는 자패(子佩)이며 유주 대군 사람이다. 원소의 아들들이 패망해가는데도 충절을 지켜 조조에게 출사하지 않았다. [ 생애] 청렴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기 때문에 형과 누이를 부모처럼 섬겨 문중에서 효자로 이름이 높았다. 유주자사 원희 밑에서 별가(別駕)를 지냈다. 205년(건안 10년) 조조가 원담을 처치하고 기주를 완전히 정복하자 초촉과 장남은 원희를 배반하여 원희와 그 동생 원상을 공격하였다. 원희와 원상은 요서오환에게로 달아났고, 초촉은 유주자사라 칭하며 유주의 모든 관리들이 조조에게 투항할 것을 백마의 피를 마셔 맹세하게 했다. 명령을 어기는 자는 목을 베겠다고 으름장도 놓으니 반항하는 이가 없었다. 한형은 자신의 ..

[메이지 천황이 죽을 때까지 시종장으로 보좌한 인물]도쿠다이지 사네쓰네(徳大寺実則)

도쿠다이지 사네쓰네(일본어: 徳大寺実則, 1840년 1월 10일(덴포 10년 12월 6일) ~ 1919년(다이쇼 8년) 6월 4일)는 막말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활동한 공경(公卿)이자 관료이다. 메이지 천황의 시종장을 역임하였다.[a Japanese statesman and Lord Keeper of the Privy Seal of Japan in the Meiji period.] 생애 [Tokydaiji Sanetsune was born to a branch of the Fujiwara court nobility in Kyoto. His father was Tokudaiji Kin'ito, and his brother was Saionji Kinmochi, later Prime Minister of Ja..

[삼국시대(동오)-하인에게 살해된 손견의 셋째 아들]손익(孫翊)

손익(孫翊, 184년 ~ 204년)은 중국 후한 말기의 장수로 자는 숙필(叔弼)이며, 손견(孫堅)의 셋째 아들이다. 용감하고 날랜 모습이 맏형 손책(孫策)과 비슷했다고 전한다. 생애 오군태수 주치(朱治)가 효렴으로 천거했다. 《전략》에 따르면, 손책이 죽음에 임하자 장소(張昭) 등이 손익으로 뒤를 잇기를 주장했으나, 손책은 손권(孫權)에게 인수를 건네 자신의 뒤를 잇게 했다. 건안 8년(203년) 단양(丹陽) 태수 겸 편장군(偏將軍)이 되었다. 손권이 옛 오군태수 성헌(盛憲)을 죽이자 성헌이 효렴으로 천거한 규람(嬀覽)과 대운(戴員)은 산 속으로 숨었는데, 손익은 단양태수가 되자 이들을 불러 군승으로 삼았다. 건안 9년(204년), 규람과 대운의 꼬드김을 받은 측근 변홍(邊鴻)에게 암살당했다. 그러나 변..

[삼국시대(동오)]-궁녀들에게 살해당한 손권의 정실]반부인(潘夫人)

潘夫人 (?~252년) 1. 개요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여성. 손권의 황후, 손량의 어머니. 회계군 구장현 사람. 통칭은 반부인(潘夫人), 본명은 반숙(潘淑).[1] 사부인→서부인→보연사를 잇는 손권의 네 번째 정실인데, 보연사는 생전에는 황후에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반부인만이 유일한 손권의 황후이다. 2. 생애 원래 죄를 지어 사형당한 하급 관리의 딸로 그녀도 연좌제로 언니와 함께 실 잣는 방에서 일하게 되는데, 그런 그녀를 보고 손권이 후궁으로 삼았다. 거기다가 결국 승은을 입어 용머리를 앞치마로 받는 태몽을 꾸고 손량을 낳았다. 그런데 250년에 이궁의 변에서 어부지리스럽게 아들 손량이 태자로 세워지자 그는 손권에게 언니를 출가시킬 것을 권해 손권이 허락해서 언니는 담소라는 사람한테 시집간다. ..

[삼국시대(동오)-손권의 총신 "여일"에게 고발당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시의(是儀

시의(是儀, ? ~ ?)는 중국 후한 말에서 삼국시대 오나라 때의 문관으로, 자는 자우(子羽)이며, 북해군 영릉현 사람이다. 본래 이름은 씨의(氏儀)였다. 행적 처음에는 현의 관리였는데, 당시 현의 상이었던 공융(孔隆)이 씨의에게 “ ‘씨(氏)’자는 ‘민(民)’의 위쪽 부분이 없는 것이므로 네놈은 머리가 없구나! 차라리 성을 ‘시(是)’로 바꾸는 것이 낫겠다. ” 라고 하자, 씨의는 그 말대로 성을 갈아 ‘시의’가 되었다. 이후 유요에게 의탁해 강동으로 전란을 피해 피신했으며, 손책의 군대에게 유요의 군대가 패하자 회계로 이주한다. 손권이 손책의 뒤를 이어 문필의 우수함을 이유로 시의를 초빙하자 시의는 손권이 있는 곳으로 도착해 신임을 받아 기밀사항을 전문적으로 처리해 기도위로 임명되었다. 여몽이 관우 ..

[삼국시대(동오)손권의 총애를 남용하다 결국 처형당한 인물]여일(呂壹)

여일(呂壹, ? ~ 238년)는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정치가이다. 행적 진박(陳博)과 함께 중서가 되었을 때 여러 관부 및 주군의 문서를 맡아 교정했는데, 손권(孫權)의 총애를 등에 업고 술의 독점권을 방해해 관장하는 이익을 차지했다. 또 성격이 가혹해 법을 매우 엄하게 집행하니 태자 손등(孫登)이 간언했지만 손권은 듣지 않았다. 그러자 여일은 더욱 기고만장해져 죄상을 들어 작은 일조차 꼭 보고해 문서를 여러 번 보고 작은 잘못으로도 대신들을 깎아 내렸는데, 그가 저지른 만행은 다음과 같았다. 고옹(顧雍)이 구금한 뒤 면직시키려고 하나 사굉(士宏)이 반준(潘濬)이 고옹의 뒤를 이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자 이를 두려워한 여일이 고옹을 겨우 면직당하지 않고 풀려나게 했다. 정주가 여일의 빈객이 법을 어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