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歷史) 마당 ♣ 1457

[삼국시대(후한 말 혼란기)-조조를 경호하다가 전사한 인물]전위(典韋)

전위(典韋, ? ~ 197년)는 중국 후한 말 조조 휘하의 군인으로 연주 진류군 기오현(己吾縣) 사람이다. 사지에 빠진 조조를 경호하다가 전사하였다. [명성] 양읍(襄邑) 사람 유씨(劉氏)가 수양(睢陽)사람 이영(李永)과 원수가 되었는데, 전위가 복수를 하게 되었다. 이영은 예전에 부춘장(富春長)을 지냈었는데, 준비함이 심히 조심스러웠다. 전위가 수레에 닭과 술을 싣고가, 거짓으로 문후를 여쭙고자 하였다. 문이 열리자 비수를 품고 들어가 이영을 죽이고, 아울러 그 아내를 죽이고는 천천히 문을 나와, 수레에 칼과 창(戟)을 싣고 걸어서 떠났다. 이영의 거처는 시장과 가까웠는데, 시장 전체가 모두 다 놀랐다. 추격하는 자가 수백 명이나 되었지만, 감히 가까이 가지 못했다. 4 ~ 5리를 가다 그 따라오던 자..

[오키나와 전투-미군에게 항전하다가 권총 자살한 인물]오타 미노루(大田 実,Minoru Ōta)

오타 미노루( 大田 実 , 1891년 4월 7일 ~ 1945년 6월 13일)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일본제국 해군의 군인이다 오키나와 전투-오로쿠 반도 지역-에서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했다. 전사했을때 계급은 해군 소장이며 사후 해군 중장으로 추서되었다.[위키백과] [Minoru Ōta (大田 実, Ōta Minoru, 7 April 1891 – 13 June 1945) was an admiral in the Imperial Japanese Navy during World War II, and the final commander of the Japanese naval forces defending the Oroku Peninsula during the Battle of Okinawa.] Japanes..

[오키나와 전투에서 전사한 미군 최고위급 인물]사이먼 B. 버크너(Simon Bolivar Buckner Jr)

오키나와에서 촬영 시몬 볼리바르 버크너 주니어(Simon Bolivar Buckner Jr, 1886년 7월 18일 ~ 1945년 6월 18일)는 미국의 군인으로 태평양 전쟁 당시 알래스카를 방어하고 오키나와 전투에서 수륙 양용 공격을 펼쳤으나 일본군의 포격으로 전사하였다. 그의 사후 1954년 7월 19일 국회에서 4성 장군으로 승진을 통과시켰다. 1886년 7월 18일 미국 켄터키주 마운폴디빌리 출생으로 아버지 시몬 볼리바르 버크너는 옛 남부 연합의 장군으로 남북 전쟁에 참전했다가 북군 총사령관 율리시스 S. 그랜트에게 항복한 사람이었다. 버지니아 군사 학교에 입학해 1908년 웨스트포인트 군사 학교에서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배려로 필리핀을 투어하기도 했다. 1919년 ~ 1923년 웨스트포인트..

[오키나와 전투-사령관의 명령으로 할복을 못하고 미군에게 포로가 된 인물]야하라 히로미치(八原 博通, Hiromichi Yahara)

야하라 히로미치 대령 야하라 히로미치(일본어: 八原 博通, 1902년 10월 2일 ~ 1981년 5월 7일)는 일본의 육군 군인으로, 오키나와 전투 당시에 일본군의 고급 참모로 활약했다.[was the senior staff officer in charge of operations of the 32nd Japanese Army at Okinawa during the American invasion of that island during World War II.] 1902년 돗토리현의 요나고시에서 태어나 최연소로 일본 육군대학에 입학하였다. 1933년부터 1935년까지는 미국에 주재한 경험이 있어서, 대전국인 미국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 개전 시에는 일본 육군 제15군 참모로서 버마 (지금의 ..

[삼국시대(조위)-조방의 두번 째 황후인 장황후의 아버지, 사마소를 제거하려다가 실패하고 멸족된 인물]장집(張緝)

장집(張緝, ? ~ 254년)은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문신으로, 자는 경중(敬仲)이다. 장기의 아들이며, 장황후의 아버지이다. 행적 아버지의 작위를 계승하여 서향후(西鄕侯)가 되었으며, 태화(太和) 연간(227년-233년) 온현령(溫縣令)이 되었다. 기도위(騎都尉) · 상서랑(尙書郞) · 동관태수(東莞太守) 등을 역임하였다. 가평(嘉平) 4년(252년) ,딸이 황제 조방의 황후가 되자 광록대부(光祿大夫) · 위특진(魏特進)이 되었으며, 당시 외척이 지는 관례에 따라 태수직을 물러났다. 장집은 재물욕은 없어도 권력욕은 있었는데, 은퇴하게 되었으므로 염려하며 자주 오(吳)와 촉(蜀)의 사정을 진술하고, 사마사(司馬師)의 물음에 답하고, 제갈각(諸葛恪)이 승리하지만 곧 살해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가평 6년(..

[삼국시대 이전 혼란기(후한 말)-한때 벗이던 조조와의 대결에서 패해 몰락한 인물] 장막(張邈)

장막(張邈, ? ~ 195년)은 중국 후한 말의 정치가로 자는 맹탁(孟卓)이며 연주 동평국 수장현(壽張縣) 사람이다. 재산을 풀어 곤궁한 이를 돕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조조와의 사이도 깊었으나 여러 사정으로 인해 여포를 받아들이고 연주 공방전을 벌이다 몰락하였다. 생애 천하의 명사 젊을 적부터 의협심이 있어 가난하거나 위급한 자들을 구제하는 데에 집안을 아낌없이 기울였다. 이에 재물로 타인을 구한다는 팔주(八廚) 중 한 명으로 이름이 높았으며[1] 많은 선비들이 따랐다. 조조, 원소와도 교우하였다. 공부(公府)에 불려가 고제(高第)로써 기도위를 지냈다. 189년(중평 6년), 진류태수로 승진해 다른 관리들과 함께 동탁 토벌을 모의하였다. 마침 광릉태수로 있던 동생 장초도 와서 이를 상의하였다. 190..

[삼국시대(조위)-위문제 사마염의 외할아버지]왕숙(王肅)

왕숙(王肅, 195년 ~ 256년)은 중국 삼국시대 위(魏)의 학자이자, 정치가이다. 작위는 난릉후. 자는 자옹(子雍). 본관은 동해군 담현이나, 회계(會稽:현재의 저장성)에서 출생하였다. 왕랑(王朗)의 아들이다. 그의 딸인 왕원희는 사마소(司馬昭)에게 시집가서 진(晋)의 무제 사마염(武帝 司馬炎)을 낳았다. 생애 아버지 왕랑이 회계태수를 지냈기에,[1] 왕숙은 그 무렵에 아버지의 임지인 회계에서 태어났다.[2] 왕숙은 관리로서 때때로 상소하여 시사(時事) · 제도(制度)에 대한 견해를 진술하고 정치활동을 행하였으며, 중령장군(中領將軍), 산기상시(散騎常侍-천자에 봉사하는 중요한 고문관)가 되었다. 황초 7년(226년), 조예가 즉위하면서 난릉후에 봉해졌다. 태화 4년(230년)에는 조진이 촉한을 치려는..

[삼국시대(조위~진):왕랑의 손녀, 왕숙의 딸, 사마소의 부인, 사마염의 어머니)문명황후(文明皇后)왕원희(王元姫)

문명황후 왕씨(文明皇后 王氏, 217년 ~ 268년)는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 ~ 진나라의의 인물로, 서진의 황태후이다. 왕랑의 손녀이자, 왕숙(王肅)의 딸이다. 사마의의 아들 사마소와 혼인하여 훗날 진나라 황제가 되는 사마염을 낳았다. 이름은 왕원희(王元姫)이며, 시호는 문명황후(文明皇后)이다.[1] 생애 8세 때 시경과 논어를 암송하였고, 이치에 맞는것을 더욱 옳게 여기게 됐으며, 참으로 문장의 뜻에 있어서는 눈으로 한번 보면 반드시 마음속에 담아두곤 하였다. 9세에, 그녀의 어머니인 평양정군 양씨(平陽靖君 羊氏)가 병에 걸리자 그녀는 어머니를 모시며 옷을 갈아입지 않을 정도로 곁에서 쉬지 않고 문병을 하였다. 매번 윗사람을 헤아리며 뜻을 살피고, 알맞은 경우에 행하여, 이로 인해 부모는 집안일을 다스..

[삼국시대-조위의 중신]왕랑(王朗)

왕랑(王朗, ? ~ 228년)은 중국 후한 말기 ~ 조위의 정치가로, 자는 경흥(景興)이며 서주 동해국 담현(淡縣) 사람이다.[1] 본명은 왕엄(王嚴)이었다. 생애 처음에는 (에 따르면) 대장군 하진의 속연이 되었다가 서주로 가서 자사(刺史) 도겸(陶謙)을 섬겼으나, 황제에게 올린 상주문이 높게 평가받아 회계태수(會稽太守)에 임명되었다. 훗날 강동에 손책(孫策)이 진출하였는데, 주변의 호족들을 규합한 왕랑은 제1표적이 되었다. 군의 공조(功曹) 우번(虞翻)은 달아날 것을 진언하였지만, 한(漢)의 신하로서 성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왕랑은 이 주장을 물리쳤다. 처음에는 고릉 땅에서 손책에게 저항하며 강을 건너 싸우는 손책 군을 여러 번 막아냈다. 손책이 손정(孫靜)의 진언을 따라 사독 길로 나와 고천둔을 ..

[삼국시대(후한 말 혼란기)-조조를 제거하려다가 실패한 인물]劉陽

劉陽 생몰년도 미상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의 인물. 왕랑의 가전에 따르면 왕랑이 젊을 때 교제가 있었던 인물로 패국의 유명한 선비였는데, 조조의 자질을 알아보고 조정에 큰 위협이 될 거라 여겼다. 조조를 적대해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기회를 잡지 못했다고 하며,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조조가 삼보의 난에서 헌제를 구출했다가 수도를 허도를 옮기면서 헌제를 옹립해 권력을 잡자 유양이 이미 죽었음에도 그의 아들을 찾기 위해 대대적인 수색 작업을 벌였다고 하며, 조조의 수색 작업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힌 유양의 아들은 도망가려고 했지만 많은 친지나 친구들 중에는 누구 하나 유양의 아들을 숨겨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젊은 시절에 유양과 친분이 있던 왕랑이 자신의 집에 숨겨주면서 조조를 찾아가 인정에 호소했다고 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