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歷史) 마당 ♣ 1457

[인디언 학살 사건- 영화 "솔져 블루"의 제작 동기가 된 학살]샌드크리크 학살(Sand Creek massacre)

원주민 생존자 호나니스트토의 증언에 따른 그림. [A depiction of one scene at Sand Creek by witness Howling Wolf] 샌드크리크 학살(Sand Creek massacre)은 1864년 11월 29일 콜로라도 의용기병대가 콜로라도 준주 남동부의 샤이엔족과 아라파호족 부락을 공격, 부락을 파괴하고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원주민들은 비무장 민간인을 포함해 70-163명이 사망했으며, 그 중 3분의 2는 여성과 아동이었다. 학살이 있었던 장소는 샌드크리크 학살 국립사적지로 지정되어 국립공원관리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수정주의 서부극 《솔저 블루:blog.daum.net/yueun46/552 별과 바람의 흔적》가 이 사건을 영화화한 것이다.[위키백과] [The Sa..

[기사 계급 몰락의 시발점이 된 전투]파비아 전투(Battle of Pavia)

파비아 전투 파비아 전투(Battle of Pavia)는 1525년 2월 24일 이탈리아 지배를 둘러싸고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가 벌인 이탈리아 전쟁 제 2기에 벌어진 전투이다. 파비아 성을 포위한 프랑스군을 역 포위한 신성 로마 제국군은 양동작전을 벌여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프랑스군의 패배로 국왕 프랑수아 1세는 포로가 되어 굴욕적인 마드리드 조약(Treaty of Madrid,1526년)을 체결하고 이탈리아, 플랑드르, 부르고뉴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포기해야 했다. [배경] 151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선출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국왕 카를로스 1세에게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이탈리아에 대한 영향력과 카를 5세(카를로스 1세의 새 명칭)의 세력..

[코페르니쿠스의 "행성들의 회전에 관한 책"이 그다음 세기에 금서목록에서 빠지게 하는 데 이바지한 인물]안드레아스 오시안더 (Andreas Osiande)

(19 December 1498 – 17 October 1552) was a German Lutheran theologian and Protestant reformer. [요약] 뉘른베르크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도입되도록 도왔다.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라이프치히·알텐부르크·잉골슈타트 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1520년 사제 서품을 받고 루터의 엄격한 신앙원칙들에 입각하여 제국의 자유도시 뉘른베르크를 개혁하는 일을 지원했다.1522년 '튜턴 기사수도회' 대수도원장 알베르트 폰 호헨졸레른을 설득하여 루터파 운동에 가담하게 했다. 또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브란덴부르크-뉘른 베르크 교회규율'(1532)의 작성을 도왔고, 전례에 대해서 보수적인 '팔츠-노이베르크 교회규율'(1543)을 편집했다. 코페르니쿠..

[마오쩌둥의 친동생-중화소비에트국가은행의 총재]마오쩌민( 毛泽民, 毛澤民, Máo Zémín)

(1896년 4월 3일 ~ 1943년 9월 27일)은 마오쩌둥의 동생으로 자는 룬롄(潤蓮)이며 후난성 샹탄시 샹탄현 출신이다. 생애 1922년 10월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이전에는 안위안(安源) 탄광 노동자들의 파업 현장에서 노동 운동에 참여했다. 1925년에는 중국 공산당 중앙출판발행부 경리로 임명되었고 1931년에 장시성 루이진시에서 민월공(閩粵贛, 푸젠성-광둥성-장시성) 군구 경제부장으로 취임했다. 마오쩌둥이 주도한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수립 과정에 참여했고 1931년 11월에는 마오쩌둥에 의해 중화소비에트국가은행의 총재로 임명되었다. 1934년 10월에는 홍군이 주도한 장정에 가담했고 1936년 2월에는 중화소비에트 공농민주정부 국민경제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38년 2월에는 신장성 디화시(현재..

[전국시대 : 주군 오다노부나가를 배신해 죽게한 "아케치 미쓰히데"의 딸]호소카와 가라샤

호소카와 가라샤 細川ガラシャ (1563년 ~ 1600년 8월 25일, 음력 7월 17일) 1. 개요 져야 할 때를 알아야 비로소 세상의 꽃도 꽃이 되고 사람도 사람이 된다. (散りぬべき 時知りてこそ 世の中の 花も花なれ 人も人なれ) - 가라샤의 사세구 일본 전국시대 인물 아케치 미츠히데의 셋째 딸로 원래 이름은 타마코(玉子). 후에 가톨릭에 귀의해 가라샤(ガラシャ[1])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당시 일본에서는 현재와 달리 혼인 후에도 부인은 원래 성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크리스천 중에서는 서양식으로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경우가 있어 가라샤도 남편의 성을 따랐다. 그래서 아케치 타마코, 호소카와 가라샤로 구별 지어 부르기도 한다. 전국시대의 소문난 미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뭔가 범접할 수 없는 기품까지 갖추고..

[청일전쟁-일본군에게 패하여 자결한 북양함대 제독]정여창(丁汝昌)

정여창丁汝昌 [Ding Ruchang] 정여창(중국어 정체자: 丁汝昌, 병음: Dīng Rǔchāng 딩루창[*], 1836년 11월 18일 ~ 1895년 2월 12일)은 청나라 말기의 군인이다. 원래의 이름은 선달(先達), 자는 우정(禹廷), 호는 차장(次章)이다. 태평천국의 난이 발발하자 처음에는 반란군 편에 참가했지만, 청나라에 전향하여 이홍장 밑에서 일했다. 이후 북양 함대의 제독이 되었고, 청일 전쟁 중에 함대전 패전의 책임을 지고 자결했다. 생애 태평천국 1836년(도광 16년), 안휘성 여강(현 여강현)에서 태어났다. 집이 유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3년 정도 사숙에 다녔을 뿐, 10살 무렵에는 학문의 기회를 잃었다. 1854년(함풍 4년)에 태평천국군이 여강을 점령하자 정여창도 엽운래(葉芸來)..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선비사회의 미움과 사랑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선비사회의 미움과 사랑 신들의 이야기인 신화와 달리 역사 속에는 인간 심성이 알알이 박혀 있다. 임금에게 미움을 받으면 유배를... 집안과 영남의 의성김씨 집안 간 우애는 오백년 선비사회의 귀감이 되었다.◆향리 아들에게 베푼 사랑숙종 때...[영남 일보] [사진 자료를 보려면 위 제목을 누르십시요] 영남일보 실록에 '유배' 3200회 등장, 골치 아픈 신하는 섬으로… 개인의 원수는 가문의 원수 "혼인 말라" 대대손손 전해 고려·조선의 왕들은 중국 황제를 따라한다고 걸핏하면 신하를 귀양 보냈다. 조선왕조실록에 귀양이란 단어가 5천여회, 유배가 3천200여회 나온다. 사진은 유배떠나는 모형. 역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신들의 이야기인 신화와 달리 역사 속에는 인간 심성이 알알이..

[네덜란드]동인도 회사 4대 총독]얀 피터루스존 쿤(Jan Pieterszoon Coen)

Governor-General of the Dutch East Indies 8 January 1587 – 21 September 1629) was an officer of the Dutch East India Company (VOC) in the early 17th century, holding two terms as Governor-General of the Dutch East Indies. 개요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4대 총독으로서 인도네시아 군도에서 포르투갈을 몰아내고 영국의 침투를 막으면서 일련의 식민지를 건설했다. 일본에서 인도에 이르는 거대한 해양제국을 건설하려던 그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정력적인 활동으로 인도네시아에 대한 네덜란드의 지배를 확립했고 그것은 4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상인..

[을사보호조약 체결에 분노하여 순절한 인물]송병선(宋秉璿)

송병선(宋秉璿) 자 화옥(華玉) 호 동방일사(東方一士), 연재(淵齋) 시호 문충(文忠) 생몰: 1836년 8월 24일 ~ 1906년 1월 24일 출생지: 충청남도 회덕현 성남리 (현 대전광역시 동구 성남동 44-27) 본관: 은진 송씨[1] 매장지: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유학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송병선은 1836년 8월 24일 충청남도 회덕현 성남리(현 대전광역시 동구 성남동)에서 아버지 송면수(宋勉洙)와 어머니 완산 이씨 사이에 장자로 태어났다. 그는 송시열의 9대손으로, 송시열 이후 권상하(權尙夏), 한원진(韓元震)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를 계승했다. 송병선은 9살 때부터 백부 송달수(宋達洙)에게..

[수에즈 운하를 건설했으나 파나마 운하 건설엔 실패한 인물]페르디낭 드 레셉스(Ferdinand Marie de Lesseps)

페르디낭 드 레셉스(Ferdinand de Lesseps) 프랑스의 외교관 ⓒ wikipedia | Public Domain 수에즈 지협(地峽)을 가로지르는 수에즈 운하를 건설한 것으로 유명하다(1859~69). 오랫동안 이름을 떨치던 관리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825년 리스본 주재 부영사(副領事) 보좌관으로 임명되었고 1828년에 튀니스, 1832년에는 알렉산드리아로 파견되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근무하면서, 나폴레옹 휘하의 한 기술자가 제안했던 수에즈 운하 건설을 검토했다. 나폴레옹의 수석기사였던 J.-M. 르 페르가 제작한 수에즈 지협 측량 보고서를 본 그는 이집트의 투르크인 부왕 무하마드 알리 및 그 아들 사이드 파샤(Pasha)와 친분을 맺은 것을 이용해 르 페르가 시작한 운하를 자신이 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