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歷史) 마당 ♣ 1457

[19세기 초 프랑스 사교계를 주름잡은 여인]줄리에트 레카미에(Juliette Récamier)

줄리에트 레카미에[Juliette Récamier] Portrait of Juliette Récamier by François Gérard (1805, detail), Paris, Carnavalet Museum. 줄리에트 레카미에(Juliette Récamier, 1777년 12월 4일 ~ 1849년 5월 11일)는 19세기 초반의 프랑스에서 당시의 정계, 예술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여성이다. 리옹에서 법률가의 딸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잔 프랑수아즈 줄리 아델라이드 베르나르 레카미에(Jeanne-Françoise Julie Adélaïde Bernard Récamier)이다. 자크루이 다비드가 그린 초상화의 주인공 레카미에 부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Portrait of Madame Récam..

[일본 공산당 설립자]노사카 산조 (野坂 参三, Nosaka Sanzō)

Sanzō Nosaka (野坂 参三, Nosaka Sanzō, March 30, 1892 – November 14, 1993) was a founder of the Japanese Communist Party (JCP) who worked for periods as a writer, editor, labor organizer, communist agent, politician, and university professor. He was the son of a wealthy Japanese merchant, and attended the prestigious Keio University. While in university, Nosaka became interested in social movements,..

[사회당 당수가 극우소년에게 살해된 사건]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인 히비야 공회당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일본어: 浅沼稲次郎暗殺事件)은 1960년 10월 일본사회당 당수인 아사누마 이네지로가 방송사 주최 3당 대표자 합동 연설회장에서 극우 청년인 야마구치 오토야에 의해 살해된 사건이다. 단상에 뛰어 오른 야마구치 오토야는 연설중이던 아사누마 이네지로 위원장을 밀쳐낸 뒤 식칼로 세번 찔러 살해하였다. 당시 살해 장면을 촬영한 사진은 후에 퓰리처 상을 받기도 했다. 사건 개요 일본의 극우단체인 대일본애국당의 당원이자 탈당 후 1960년 7월에 전아시아반공연맹 도쿄 지회에 가입한 야마구치 오토야는 친중국정책과 친노조, 사회주의 성향이던 일본사회당의 정책에 반감을 품고 일본사회당 인사들의 암살을 계획한다. 1960년 6월 17..

[가부키를 창시한 여인]이즈모 오쿠니( 出雲阿国 Izumo no Okuni)

이즈모 오쿠니(일본어: 出雲阿国, いずもの おくに, 1572년 - 1613년?)는 가부키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여성 창시자이다. 於国, 国, おくに, くに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된다. 사망한 날짜는 1613년에 죽었거나 1658년에 죽었다는 등 여러가지 가설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2대째 아쿠니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하는 설도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즈모노쿠니 마쓰에의 나카무라 산에몬의 딸이고 이즈모 대사의 무녀가 되었고 이즈모 대사 권리를 위해 일본 전역을 순회했는데 좋은 평판을 얻었다고 여겨진다. 확실한 자료로는 "시경경기"(時慶卿記)에 나온 이야기에서 1600년 교토에서 나라와 국화의 2명이 교토 근위전으로 "ややこ踊り"을 췄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 것이 일반적으로 확실한 증거이..

[가마쿠라 막부 시대-비구니 쇼군이라 불린 여인]호조 마사코(北條 政子)

호조 마사코 호조 마사코(일본어: 北條 政子, 호엔(保元) 2년(1157년) - 가오(嘉應) 원년 음력 7월 11일(1225년 8월 16일))는 일본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말기에서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1192~1333년(고려 23대고종 원년~ 27대 충숙왕 18년)] 초기의 여성이다. 가마쿠라 막부를 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의 정실 부인으로, 이즈 국(伊豆國)의 호족이자 가마쿠라 막부의 초대 싯켄(執權)이 된 호조 도키마사(北條時政)의 맏딸이다. 요리토모와의 사이에 요리이에(賴家), 사네토모(實朝) 두 아들과 오오히메(大姬), 산만히메(三幡姬)의 두 딸을 두었고, 형제자매로는 무네토키(宗時), 요시토키(義時), 도키후사(時房), 아와노쓰보네(阿波局), 도키코(時子) 등이 있다. 이즈의 유인..

[이징옥 장군 이야기]"듣거라 하늘아, 나는 大金의 황제니라" 외

[박종인의 땅의 歷史] 듣거라 하늘아, 나는 大金의 황제니라2017.05.24 | 조선일보 | 다음뉴스 친 수양대군파는 함길도 절제사 이징옥을 파면하고 서울 복귀 명을 내렸다. 다른 말이...두 달이 채 되지 않아 종성 판관 정종 무리가 이끈 자객들에 의해 온몸에 화살을... ---------------------------------------------------------------------------------------------- 이징옥 장군의 극적인 인생 스토리 수 없다고 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김해부사 정종은 후에 함경도 종성부사가 되었고, 이징옥은 함경도 절제사가 되었다. 이징옥은 정종의 과거를 까맣게 잊어 버렸으나 정종은 과거지사가 탄로날까봐 늘 노심초사... www.yangsanil..

[도쿠가와(에도) 막부 설립의 계기가 된 전투]세키가하라 전투

세키가하라 전투(일본어: 関ヶ原の戦い세키가하라노 다타카이[*])는 1600년 음력 9월 15일(10월 21일) 일본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에 일어난 유명한 전투이다. [읽기 전에 참고할 내용] 이 전투에서 도요토미 가(서군) 편에서 싸운 모리 데루모토는 죠수번의 번조, 시마즈 요시히로는 사쓰마 번의 초대 번주 시마즈 이에히사의 아버지이며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을 죽게 한 인물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두 가문의 후손들이 1868년에 일어난 메이지 유신의 주도 세력이라는 점이다. 이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한 뒤 268년 만에 도쿠가와 가에게 복수한 것도 된다. 1592년 조선을 침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군 편에 서서 싸운 주력 가문-모리 가, 시마즈 가-의 후손들이 1910년 한반도를 식민지..

[조선- 자선사업가]박잉걸(朴仍傑)

모은(慕隱) 박잉걸(朴仍傑) 1676년 칠보면 백암리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여웅(汝雄)이다. 북면사무소에서 칠보로 가는 길, 백암초등학교 앞 도로는 '걸치기'로 불린다. '무언가'를 '걸친다'는 말에서 붙은 이름이다. 이곳이 바로 가진 이와 없는 이 모두가 더불어 함께 잘사는 공유의 세상을 이루려던 그의 따뜻한 혼이 지금도 느껴지는 곳이다. 그는 당시 군의 중심지였던 이곳에 막(幕)을 치고 언제나 누구든지 입고 신을 수 있도록 옷과 신발을 걸어 두었다. 그러자 가난한 사람들이 먼 곳에서까지 찾아 와 옷을 갈아 입고 신발을 걸어 두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곳을 '걸치기'라 불렀다. 지금도 이곳은 '걸치기'로 불리고 있다. 그는 칠보와 산내의 교류를 위해 지금 구절초 축재가 열리는 곳인..

[일제강점기-밀정, 친일 반민족 행위자]이종형(李鍾馨)

이종형(李鍾馨, 1895년 4월 20일 ~ 1954년 2월 15일)은 대한민국의 언론인 출신 정치인이다. 본명(本名)은 이종영(李鍾榮)이다. 일제 강점기 시대 만주 지역에서 관동군 촉탁 밀정 활동으로 악명이 높다. 밀정 활동 중에는 권수정(權守楨)이라는 가명도 사용했다. 강원 정선에서 출생하였으며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어린 시절 함남 원산에 유학하여 원산에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에 유학하여 와세다 대학교 법학과 보통청강과정을 다니다가 1918년 중퇴했다고 주장한 바 있으나, 와세다 대학교 학적 퇴학 명부에서 찾을 수 없어 믿을 수 없다는 견해가 있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복역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 또한 본인의 주장일 뿐 사료 가운데..

[구한말 여류시인] 오효원(吳孝媛)

오효원[吳孝媛] [1889(고종 26~미상)] 본관은 해주(海州). 경상북도 의성(義城) 출생. 초명은 덕원(德媛), 호는 소파(小坡)·수구(隨鷗). 아버지는 당시 관리였던 수양산인 경금옹(慶今翁) 오시선(吳時善)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9세부터 남자의 복장을 하고 글방에 다녔으며 얼마 되지 않아 시를 지을 줄 알았다고 한다. 1898년(광무 2)에는 의성과 이웃 두 군에서 실시하는 백일장에서 일등을 차지했다. 1902년(광무 6) 14세 때 공금을 사사로이 쓰는 일으로 인해 수감된 아버지를 용서받고자 홀로 상경했다. 판서(判書) 김종한(金宗漢)·민영선(閔泳璇) 등에게 울며 애걸해 부녀 결연과 사제 의리를 맺어 아버지를 구했다. 이때부터 시 모임에 나가기 시작해 당시의 유명했던 구로회(九老會)까지 출입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