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歷史) 마당 ♣ 1457

[프랑스 제 2제정의 몰락을 가져온 전투]스당 전투[Battle of Sedan]

스당 전투[Battle of Sedan]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때 프랑스군이 참패한 전투(1870. 9. 1). The movements of the French and German armies from 23 to 29 August. Red: French, Blue: Germans 이 패배는 결국 프랑스 제2제정의 몰락을 초래했다. 전투는 뫼즈 강 연안의 프랑스 국경에 있는 스당 요새에서 마크 마옹 원수가 이끄는 12만 명의 프랑스군과 헬무트 폰 몰트케 장군이 지휘하는 20만 명의 프로이센군 사이에 벌어졌다(→ 독일사, 제2제정). 마크 마옹은 메스에 갇힌 프랑스 라인군을 구출하기 위해 나폴레옹 3세와 함께 샬롱쉬르마른에서 메스를 향해 북동쪽으로 진군할 예정이었다. 몰트케는 신문 보도를 통해 마크 마옹의..

[반역 혐의로 체포됐었던 3대 부통령]에런 버 2세(Aaron Burr, Jr)

Portrait by John Vanderlyn, 1802 에런 버 2세(영어: Aaron Burr, Jr, 1756년 2월 6일 ~ 1836년 9월 14일)는 미국의 정치가로, 반 연방주의자이다. 1801년에서 1805년까지 토머스 제퍼슨 행정부의 부통령을 지냈다. 부인은 시어도시아 버(Theodosia Bartow Prevost Burr)이다. 루이지애나 준주에서 민병대를 조직해 루이지애나 준주를 빼앗아 새로운 친 프랑스 국가를 만들려는 음모를 계획하고, 친구인 제임스 윌킨슨과 함께 멕시코를 공격하여 ‘멕시코의 황제’라 참칭했으나 월킨슨의 배신으로 실패했다. 외할아버지는 저명한 장로교 목사 겸 신학자였던 조너선 에드워즈였다. 정치경력 초기 생애 에런 버는 미국 뉴저지 주 뉴어크에서 태어났고, 뉴욕주 ..

[독일 통일의 계기가 된 전보 조작 사건]엠스 전보 사건(EMS電報事件)

엠스 전보 사건(EMS電報事件, 독일어: Emser Depesche, 프랑스어: Dépêche d'Ems, 영어: Ems Dispatch)은 프로이센의 군주 빌헬름 1세가 프랑스로부터 받았던 전보를 의도적으로 편집하여 세간에 공표한 사건이다.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와 얽혀서 불거졌으며 이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경과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 1868년 9월 스페인에서 후안 프림(Juan Prim y Prats)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정권에 대한 불만이 터져 각지에서도 반란이 잇따랐고 이는 혁명으로 파급되었다. 군의 지지를 받지 못했던 이사벨 2세는 프랑스 제2제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스페인은 1869년 1월 처음으로 보통선거를 실시하여 의회를 구성한 뒤 헌법을 공포하여 입헌군주..

[중화민국-군벌, 3불 장군,마약왕]장쭝창(张宗昌)

중화민국 안국군 부사령관 중화민국 직로연군 총사령관 정체 張宗昌 간체 张宗昌 한국식 독음 장종창 영문 Zhang Zongchang 자 효곤(效坤) 출생 1881년 2월 13일 청나라 산동성 액현 사망 1932년 9월 3일 중화민국 산동성 제남 국적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학력 녹림대학 마적과(학사장교) 직업 정치가, 군인 종교 유교 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봉천군벌의 맹장으로 2차 직봉전쟁 이후 산동독판이 되어 산동을 지배하였으나 방탕하고 폭력적인 생활 때문에 혼세마왕, '개고기 장군(狗肉將軍)'이라는 비아냥을 들었고 재산이 얼마인지, 부하가 얼마인지, 부인이 얼마인지 모른다 하여 '삼불장군(三不將軍)'이란 별명도 있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81년 산동성 액현 축가촌에서 태어..

[삼국시대(촉한): 4대 재상 중 한 명]장완(蔣琬)

장완 장완(蔣琬, ? ~ 246년)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신료로, 자는 공염(公琰)이며 영릉군 상향현 사람이다. 제갈량(諸葛亮), 비의(費禕), 동윤(董允)과 함께 촉의 사상(四相)으로 꼽힌다. 시호는 공후(恭侯)다.[1] 생애 약관의 나이에 천릉에 사는 외종제 유민(劉敏)과 함께 이름이 알려졌다. 장완은 주서과의 신분을 지니고 유비(劉備)를 따라 촉 땅으로 들어가 광도현의 장이 되었다. 일찍이 유비가 촉나라 땅을 돌아보던 중 광도현을 방문하게 됐는데, 장완이 맡은 집무를 해결하지 않은채, 술에 취해 있는 것을 보고는 매우 노여워하여 장완을 처벌하려고 했다. 그러자 그 당시에는 군사장군으로 있던 제갈량이 유비에게 간청하며 건하였다. "장완은 국가의 그릇이지, 백리를 다스릴 인재가 아닙니다. 그의 정무 ..

[로스차일드가의 창시자]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Mayer Amschel Rothschild)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Mayer Amschel Rothschild, 1744년 2월 23일 ~ 1812년 9월 19일)는 독일의 유태인 은행가이다. 오늘날 유명한 로스차일드 가를 만들었다. 2016년 현재 로스차일드 가문의 재산 현재 로스차일드가의 재산은 베일 속에 감춰져 있으며 제대로 된 접근 자체도 불가능하지만, '화폐전쟁'의 저자 쑹훙빈은 로스차일드가의 재산을 약 50조달러(약 6경원, 6만조원)로 추정했다. 제2차대전 당시, 히틀러 총리 겸 대통령은 유태인을 대량학살했다. 당시 유럽사회에서는 로스차일드라는 이름을 직접 사용하는 것 조차 모든 언론에서 금기시되며, 단지 유태인이라고만 부를 수 있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의 금융시장을 모두 로스차일드가가 장악하고 있었으며, 막대한 부로 세 나라의 ..

[을사보호 조약 체결에 항의하여 자결한 인물]조병세(趙秉世)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趙秉世 출생 1827년 6월 2일 한성부 회동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1가·회현동2가·충무로1가·남대문로3가) 사망 1905년 12월 1일 한성부 본관 양주 조씨 자 / 호 치현(穉顯) / 산재(山齊)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1] 상훈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이용직이 그의 사위이며, 한진그룹 조중훈의 조부 조병규(趙秉圭)는 그의 8촌이다. 2. 생애[편집] 2.1. 관직 경력[편집] 조병세는 1827년 6월 2일 한성부 회동에서 홍천현감을 역임한 조유순(趙有淳)과 대구 서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6대조는 노론 4대신 중 한 사람으로 손꼽혔던 조태채이며, 5대조 조관빈(趙觀彬)은 관중추부사와 홍문..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한음 이덕형과 노계 박인로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한음 이덕형과 노계 박인로[12시간전 | 영남일보] 해남의 거부였고 노계는 빈한한 집안의 영남선비였다. 어려움 속에서 주옥같은 글을...그를 기리고 있다. 여행작가·역사연구가경북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 낮은 산자락에...[사진자료를 보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조선 최고 엘리트와 영천 초급관리의 우정…주옥같은 詩를 낳았다 경북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 낮은 산자락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작은 서원이 하나 있다.이곳은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한국가사문학의 3대 시성으로 불리는 노계 박인로 선생의 학문과 충효를 기리기 위해 지역 유림이 세운 도계서원이다. 옛사람들은 선비의 아름다운 만남을 '담수지교(淡水之交)'라 불렀다. 깨끗하고 담백한 선비의 교유를 '맑은 물의 사귐'이라 하..

[일제 강점기- 창씨 개명을 거부하고 자결한 인물]설진영(薛鎭永)

설진영(薛鎭永, 1869년 ~ 1940년)은 구한말의 학자이자 의병이다. 본관은 순창이며 초명은 설진삼(薛鎭三), 자는 도홍(道弘), 호는 남파(南坡), 율재(栗齋)이다. 1895년(고종 32년)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기우만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장성ㆍ나주 등지에서 왜병과 싸웠다. 1940년 일제가 조선 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이를 거부하여 맹세코 성을 고치지 않겠다는 절명시(絶命詩) 2절과 유서를 남기고 우물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위키백과] ----------------------------------------------------------------- 개설 본관은 순창(淳昌). 초명은 설진삼(薛鎭三). 자는 도홍(道弘). 호는 남파(南坡) 또는 율재(栗齋). 아버지는 통정(..

[일제가 창씨 개명을 강요하자 자결로 항의한 인물]유건영(柳健永)

유건영(柳健永)[1883(고종 20년)~1940] 개설 본관은 문화(文化). 호는 석전(石田). 전라남도 곡성 출신. 아버지는 유봉묵(柳琫默)이다. 농촌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약관의 나이에 거유(巨儒) 최익현(崔益鉉)과 기우만(奇宇萬)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생애 및 활동사항 그 때 위정척사사상과 구국을 위하여 사생취의(捨生取義)하는 대의(大義)의 도를 배워 망해가는 조국을 건지고자 결심하게 되었다. 최익현이 의거의 기치를 올리고 순창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을 전개하자 이에 입진하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의진이 패배하여 최익현과 임병찬(林炳瓚) 등이 대마도(對馬島)로 압송되고 의진이 해산되었다. 시세가 의병운동 전개에 불리함을 깨닫고 농촌에 들어가 일제의 삼엄한 감시하에서도 청년자제들을 교육..